담론 2장 사실과 진실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읽다가 문득

by 닐슨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의 맨 처음엔 항상 시가 있었다. 그리고 시를 배웠다. 하지만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시를 배운 것이 아니었다. 시를 분해하고, 앞의 단어가 뒤의 단어와 댓구가 된다는 붉은 화살표를 그려 넣고 청각과 촉각, 시각에 대해 암기를 하고 두 개의 감각이 합쳐진 ‘공감각적’이라는 말을 배웠다. 나에게 시는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시란 원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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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정재찬 선생님이 쓴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읽었다. 조금 길지만 책의 한 부분을 잠시 소개한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연결할 때는 어딘가 멋과 여유마저 느껴지는 듯하더니, 어머니를 떠올리는 순간 시인은 연거푸 어머니를 되뇌며 뭔가에 걸리거나 홀린 듯이, 아니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것이다. (중략) 이젠 별이 모자랄 지경이다. 아까까지는 시행 하나에 이름 하나 붙이더니, ‘어머니’를 떠올린 이후 호흡은 빨라지고 시행은 길어진다. (중략) 그리운 사람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지만 만날 수 없으니 또 얼마나 고통인가. 그러기에 윤동주는 그 잠시의 행복한 추억이 끝나는 순간 고통스럽게 인정한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별은 그런 거라고. -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중에서


시와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잊었다. 그러다가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 2장 사실과 진실을 읽게 되었다. 담론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시는 인식의 틀을 깨트려 세계를 뒤집어보고 바로 그것이 공부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학교에서 배운 시는 무엇이었을까. 시를 조각내고 분해하고 뜯어보는 것, 결단코 그것은 공부가 아니었다. 세계를 뒤집어 보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고 그 공부는 바로 진실의 창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시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아직도 세계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세계를 알아가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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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는 “세계 인식의 틀이다. 시서화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틀이다. 하지만 언어와 숫자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세계 인식의 수준이다. 오늘날 시서화악을 교양이나 예술이라는 인식의 틀에 가두어두고 있다. 유연한 시적 사유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아직도 시를 모른다. 시를 모르기에 공부를 모른다. 공부를 모르기에 세상을 모른다.


신영복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고 책장에서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꺼내 들췄다. 나는 아직도 세상을 모른다. 그리고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책에 쓰여있는 시를 읽으며 더없이 아름다운 시어에 빠져 한참 동안 선 채로 책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나태주 시인의 <돌멩이>를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돌멩이 - 나태주

흐르는 맑은 물결 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 일렁이는
얼룩무늬 돌멩이 하나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야지
집어 올려 바위 위에
놓아두고 잠시
다른 볼일 보고 돌아와
찾으려니 도무지
어느 자리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혹시 그 돌멩이, 나 아니었을까?

그랬다. 나, 바로 그 잃어버린 돌멩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돌멩이 찾으러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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