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어떤 아침에는
─ 책방 아저詩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자신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함에 빼앗김의 방관.
더 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의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故 박혜정의 유서에서

_이혜경, 『길 위의 집』 中


제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요. 시공에 붙들린 육신 속에 거하는 영혼이 겉돌지 않는, 그러니까 누구든 바람직하다 여길 만한 상이랄지 가치 등과 제 육신을 부려 가꾸는 삶이 일치하는 형편은 아닐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그러자니 불편부당한 당장의 현실을 밀쳐두고서 살아간다? 삶에 충실?! 당초 이게 가능한지 여부, 파고들어 시시비비 따질 겨를 없이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이 삶. 그렇다고 솟구치는 의구심 지워지진 않습니다(지워지긴커녕 외려 또렷하여 지지 않나 싶고요. 뭐 그래서, 잊으려고 애를 쓰자니 술이 필요하고 그래서 '술 권하는 사회'인지도 모르겠지만요;;). 타협이라지만 실상은, 제가 어찌할 수 있는 바까지 어쩔 수 없다는 문장 아래 복속시킴으로 해서 영육 간 부조화로 인해 부대끼는 느낌을 애써 모르쇠하는 것뿐 아닌가 싶고요. 이르자면 '방관'이겠어요. 이렇게 한번 '방관'을 떠올리면 이렇게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건 참 뻔뻔한 일이구나 하는 데에까지 기어이 닿게 마련인데. 이런 상태로 현실 생활 가능?! 이게 제정신으로 감당 가능한가??


'안 된 일이나 나는 그리 못하겠습니다.. 그렇게는 살기 어렵습니다.. 부끄러워서..'


그저 제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살아갈 수 있기를. 1인의 소박한 바람은 그래서 유서로 맺게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는 증거합니다, 개개의 무책임과 방관이 엮은 그물이 옥죄었던 당시를. 이는 '당시'로 갈음되고 만 것인가. 그렇다면 다행이겠는데..


어느 한구석이 끊임없이 무너져내리는 세상. 실상은 마치 소비를 촉진하려 생산 단계에서부터 진부화를 계획하듯, 이러한 기획과 계획, 인위와 작위가 벌이는 짓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짓을 벌이는 데에는 반드시 무책임, 방관과 짝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누구든 협잡의 유책 혐의를 벗기도 어려운 형편 아닐까 싶고요. 이런 와중에 멀쩡한 모습으로 하루를 구가한다는 자체가 이미 심중의 병이 깊은 게 아닌가 싶고 말이죠.

정말이지 무슨 짓거릴 하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데에 생각 미치니 밀려드는 수치심을 감당키 어려운 처지란 걸 겨우 직시하게 되나 싶고 그렇습니다. 이거 참 ~~;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_최승자,詩 「어떤 아침에는」 中


7년 전이던가요, 한 대학생이 게재한 대자보에서 비롯된 물음을 다시금 곱씹어야 할 때가 다름아닌 지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녕, 하십니까(어떻게 안녕, 할 수 있지요?!)

멀쩡, 하십니까(어떻게요??)


괄호 속 울림이 자꾸 커지는 게 하.. 정말이지 인생, 좀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 말이죠;;

'한점 부끄럼없이 ~' 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만 한점으로 면적 없이 쭈그러들고만 싶어요;;



붙임. 1 : head 삽입 이미지는 직접 찍은 것입니다. 서점 화분에서 자라는 달팽이~에오 ~ '0'/

붙임. 2 : 인용시는, 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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