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주노초파남보. 무슨 색깔 립스틱을 바를까요?
“엄마, 나 이제 진짜 못하겠어. 여기 사람들도 그렇고 일하는 것도 너무 이상해. 하루하루 출근하는 게 정말 죽을 만큼 힘들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원래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야! 죽을 만큼 힘들면 다른 애들은 거길 어떻게 다니니?”
이 이야기를 정확히 10년 정도가 흐른 지금의 내가 들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경우의 수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1번. 부모님에게 말씀드릴 필요 없다. 성인이 된 나의 선택은 내가 한다. 내 멋대로 퇴사한다.
2번. 다년간의 경험으로 쌓인 논리적인 설명으로 부모님을 잘 설득시켜 병원을 퇴사한다.
3번. 그때와 다르게 이유 없는 직장 괴롭힘에는 나 역시 똑같이 반격하며 대들어본다.
4번. 모든 것이 나의 업이고 이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거니 참고 인내하고 받아들이며 그냥 직장을 다닌다.
그런데 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다년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내가 마치 그때의 그러한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수도 있는 일일테고 또한 내가 그런 일을 겪음으로 인해서만 내가 보고 느끼고 배우며 성장한 것이 반드시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 키는 170 근처를 웃도는 키로 사회에서 정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결코 작은 키가 아니다. 그런 나의 몸무게는 대학 시절 내내 유지하던 그때와 입사 당시에도 50킬로대 전후로 밥을 조금 잘 먹는 날에는 50~51킬로그램, 바빠서 밥을 잘 못 먹었거나 활동량이 유독 많았던 날에는 49킬로그램 정도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던 내가 신규 간호사로 입사한 지 3주도 되지 않아 45킬로그램이 되었다. 얼굴 살이 쭉쭉 빠지고 팔다리는 가늘고 마른 정도를 떠나 툭 치면 바스러질 것 같은 다 죽은 나뭇가지 같았다.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른 장작에나 써먹어야 할 불쏘시개 역할의 잔가지 같았다.
피부가 하얀 편에 속했던 나는 입사 이후 1주일, 2주일이 지나면서 급격하게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매일을 울고 잠도 못 자 퀭한 눈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 그날도 새벽같이 일어나 어두운 안색을 가려보고자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나가려고 거울 앞에 선 순간이었다.
“내... 얼굴... 왜 이래?”
말 그대로 진짜 내 얼굴이 왜 이래? 육성으로 소리가 터졌다. 나의 표현력의 한계일지 모르지만, 살면서 나는 사람 얼굴빛이 이렇게까지 시멘트 빛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얀 피부, 조금 누런 피부, 붉은 기가 있는 피부, 까무잡잡한 피부, 검게 그을린 피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정말 시멘트빛이었다. 콘크리트 외벽에서나 볼 수 있는 색채가 없고 명암만 남아있는 회색빛의 얼굴을 보다가 망연자실했다.
왜 이렇게 생기가 없냐... 입술이라도 찍어 발라야 할까. 서랍 안에 굴러다니는 이름 모르는 립밤을 입술에 짓이겨 발랐다. 이마저도 바르면서 수도 없이 고민하는 내가 웃겼다. 립밤 하나 바르는 것도, 외투 하나 걸치는 것도 모든 것이 다 눈치가 보이는 신규 간호사였기 때문이다. 이건 이미 몇 주 간의 병원 생활을 하며, 선배 간호사들과 함께 같은 탈의실을 쓰며 생긴 일종의 버릇과 습관이었다.
“야, 너 안 춥냐? 코트를 입고 왔어? 패션쇼 나가냐? “
3월의 쌀쌀한 봄날. 그렇게 나는 내가 입고 출근했던 코트를 까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 출근에는 코트가 아닌 야상 점퍼를 걸치고 갔다. 그러자 들려온 말은 또 별개였다. 아니 사실 어떤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뭐야, 너 오늘 야상 입고 출근했니?”
어쩌라는 건지. 남이사 코트를 입던 야상을 입던 뭘 입고 출근하던 댁들이 무슨 상관이신지. 어차피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일을 할 테고, 그렇다고 내가 예의에 맞지 않게 슬리퍼를 직직 끌면서 잠옷바지를 입고 직장에 온 것도 아닌데 별 것도 아닌 옷차림으로 자기들끼리 유난이었다. 내가 별로 타격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지 않으니 그다음 날은 조용했다. 그런데 하루의 오프(라고 해봐야 출근이 무서워 벌벌 떠느라 그냥 날려버린 하루였다)를 지나 다시 출근한 병동에서 나는 이제 옷이 아닌 화장으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야, 넌 아직도 기운 좋다. 이 새벽에 화장하고 나올 시간이 있어? 어디 패션쇼 가니?”
거울을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다.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어려운 신규였다. 그래서 물도 마시지 않았다.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큰일이니까. 바빠 죽겠는데 눈치 없이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냐고 물어보는 순간, 살기 어린 눈빛을 받아야 했기에 그보다는 차라리 갈증을 삼키며 바짝 메말라가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 퇴근 때가 돼서야 탈의실 캐비닛 안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보았다. 아침에 발랐던 선크림과 립밤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여전히 얼굴빛은 회색이었다.
그러고 난 다음날, 거울 앞에 서니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진하게 화장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이라인을 그리고 아이섀도를 펴 바르고, 마스카라로 힘껏 속눈썹에 힘을 주고,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것도 아닌데 패션쇼에 가냐며 이 새벽에 화장할 기운도 있다고 비아냥대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은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외모에 자신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귀찮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선배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 딱 이 하나의 이유였다. 그렇지만 뭐 번번이 나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없었다. 눈치를 보며 도둑고양이처럼 병동으로 살금살금 들어가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차지 선생님이 나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인사는 했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어 익숙하게 간호사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휴, 아무도 없다. 그렇겠지. 아직 출근 시간은 1시간도 더 넘게 남아있으니까.
빠르게 유니폼을 갈아입고 명찰을 목에 걸고, 머리 망에 내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가지 않게 꼭꼭 밀어 넣으며 구겨진 데가 없는지 옷소매와 간호화를 확인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매일매일이 병원 안에서 그들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나는 가장 최하위에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보병 1이었다.
아침 인계시간이 가까워지면서 하나둘씩 선배 간호사들이 출근하기 시작했고 나는 구석으로 몸을 붙여 꾸벅 인사를 했다. 마치 개업한 식당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풍선인형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다들 조용했다. 이제 맨얼굴로 다녀야겠다. 조금 아파 보이나?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이런저런 말들이 없는 건가? 아파 보이면 조금의 동정심은 살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다 곧 관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점심시간.
얼마만의 점심인지 모른다. 구내식당으로 들어와 앉아 식판을 앞에 두고 조금씩 국과 밥을 몇 수저 떠먹었다. 애초에 입 안으로 잘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아서 유치원생 급식 배급만도 못할 수준의 양을 떠 온 나는 진즉 식사를 끝내고 앞에 선배들의 식판 속 남아있는 반찬들의 양을 계산했다. 5분 정도면, 다 먹고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던 것 같다. 급식판을 비우고 물컵에 정수기 물을 한 모금 따라 마시며 선배들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왔다. 커다란 병원 속 미로 같은 그곳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그러다 문득 선배 간호사들의 동료들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게 됐다. 몇 병동에 있는 선생님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부터 하고 봤다.
이름도, 소속도 잘 모르는 선배 간호사들이었지만 그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더니 나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며 “너네 신규?”하고 물었다. 팔짱을 낀 직속 선배 간호사는 말하기도 귀찮은 건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5층에서 문이 먼저 열리고 우르르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아, 5층에 계신 선생님들이었나 보다. “수고하십시오.” 딱딱한 인사를 끝내고 나니 엘리베이터에는 어느덧 우리 층 선생님들만 남았다.
내리자마자 양치질을 하고 다시 차팅도 배우고, 라운딩을 돌다 보면 그래도 퇴근시간이 되긴 되겠지? 오늘은 그래도 좀 낫다.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새 병동 간호사실이었다. 한 손에 치약칫솔 세트를 쥔 선배 간호사가 내 옆을 지나갔다.
아, 나도 양치해야지. 빠르게 캐비닛을 열어 허리를 숙이고 칫솔치약을 찾았다. 그리고 내 머리 위로 선배의 목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야, 너 화장 좀 하고 다녀라.”
“예?”
“동네 슈퍼 가는 것도 아니고 화장 좀 하고 다니라고. 쪽팔리게. 병원에 놀러 오니? 좀 꾸미고 다니라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정말 나는 모르겠다.
아수라백작도 아니고 한쪽은 화장, 한쪽은 맨얼굴 이렇게 다녀야 욕을 안 먹을 수 있을까?
왼쪽은 선크림과 아이라인, 아이섀도와 새까만 마스카라로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오른쪽 얼굴에는 밋밋하고 아픈 모습을 강조해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맨얼굴로 출근하면 “야, 너 진짜 똑똑하구나? 그래 이거지. 이렇게 반반씩. 적당히 하란 말이야!”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이게 바로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인 경우였다.
음... 내일은 진짜 그렇게 출근해 볼까? 반반씩?
혼자 상상하다가 그런 내 모습이 어이가 없고 웃겨 관뒀다. 이렇게 사람이 미쳐가는 게 아닐까?
그 언젠가 어릴 적 봤던 미녀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동화책이 떠올랐다. 내가 공주라는 것도 아니고 잠을 잤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단지 그 동화책에 나오던 어마무시하던 마녀의 손톱과 긴 머리카락,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얼굴이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웃고 있는 그 입술이 점점 옆으로 길게 찢어지며 그 안으로 보이는 빨간 혓바닥까지 상상됐다. 그리고 이내 깔깔거리는 마녀의 웃음소리까지.
어쩌면 나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닐까?
마녀와 잠자는 병동의 우울증 환자가 된 건 아닐까?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그랬을지 모른다.
근묵자흑이라고, 비슷한 환경 그리고 그런 사람들 곁에 있으면 닮아간다고 했다.
난 스스로 그곳을 나왔다. 쉽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해냈다.
내 얼굴빛이 회색이 아니라 정말 검게 변해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기 전에 발을 뺐다.
훗날 그 병원을 퇴사하고 다른 병원에 입사했을 때였다.
아침 주사 처방을 다 돌고 간호사실에 앉아 선생님들이 미리 타놓으신 믹스 커피 한잔을 먹으며 잠깐의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이런 호사라니. 선생님들과 함께 오전 10시에 마시는 맥심커피라니. 감격스러웠다. 아무도 나를 왕따 시키지 않는 이 공간, 이 시간. 꿈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 한 분께서 나에게 물었다.
“맞다, oo선생님. 전에 B병원 다녔다고 하지 않았어?”
“네. 맞아요. 오래는 못 다녔어요.”
“그렇지, 오래 다닐 수가 없지. 괜찮아, 나도 거기 다녔었거든. “
“아, 진짜요? 와. 몰랐어요.”
“여기 oo선생님도 그 병원 출신이야. 일주일 만에 뛰쳐나왔지만.”
“아 정말요? 와... 저 진짜 몰랐는데. 그러셨구나... 힘드셨겠어요.”
“야, 말도 마. 아휴, 진짜. 그때만 생각하면...”
그렇게 기억 속에 잠시 모른 척 묻어두고 지냈던 때가 떠올랐다. 아프다기보다는 그 당시엔 화가 더 많이 났던 것 같다. 다들 너무나도 어렸기 때문이다. 스물셋, 스물넷, 스물다섯. 어린 날의 청춘이라는 이름에 그리고 가슴에 상처를 새겨버린 쓰디쓴 첫 직장. 그러다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근데, 넌 뭐 어떤 걸로 태우디? 나는 입술 색깔 가지고도 뭐라 하더라. 아휴 걔네 다시 만나면 진짜... “
“아... 저는 뭐, 옷 입는 걸로도 뭐라 하시고 화장하고 다녀도 뭐라 하시고 생얼로 가도 슈퍼 왔냐고 하시던데요. 할 말이야 많죠... 선생님은요? “
“야. 말도 마. 그날이 내가 장염 걸려서 밥도 못 먹고 밤새 화장실 들락날락거리다가 출근한 날이었거든? 아픈 거 꾹 참고 출근했는데 내 얼굴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였어. 너 입술 색깔이 왜 그렇게 파래? 가서 립스틱 안 발라? 내가 그때 진짜 서러워서... 몰래 화장실에서 엄청 울었다니까?”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해 드릴 수 있어서, 비슷하게 쓰라린 경험이지만 이제는 웃고 떠들 수 있을 정도로 조금은 담담해져서, 지금은 그 지옥 같았던 곳에서 벗어나 이렇게 커피 한잔씩 손에 쥐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아픈 사람에게 그렇게 하는 건 아닌데... 안 아픈 사람이어도 맞지. 그런 말은 하지 말지...
난 가끔 립스틱을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입술이 잘 트는 체질이라 립스틱 자체를 잘 바르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화장품 코너에 진열된 형형색색의 립스틱을 볼 때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때 그 선생님들은 도대체 어떤 색깔의 립스틱을 바르고 갔어야 과연 마음에 들어 했을까?
과연 그런 게 있긴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