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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네 Oct 14. 2023

보는 것과 바라보는 것

두바이 일기

기억은 사라진다.

하루 24시간 중 기억에 남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오늘 먹은 점심도 바로 기억이 안 나는데… 안 그래도 짧은 인생, 그중 일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만 하는 걸까?

어떤 기억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내가 투자한 그 시간과 경험이 아예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뇌는 기억을 더 많이 한다고 해서 더 빨리 늙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매일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특별한 일을 만드는 것도 한계가 있고.


몇 안 되는 일기 중 2021년 11월 두바이 파견 생활 중 쓴 글을 찾았다. 지금 보면 아주 형편없지만 보는 것과 바라보는 것이 주는 기억의 차이를 처음 느꼈던 때인 것 같다. 덕분에 이때의 시간만큼은 다행히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그냥 보는 것을 넘어 잠시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짧은 인생의 한 순간이라도 더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두바이의 주말은 금, 토요일이다.

불금이 아닌 불목을 외치는 중동에 야심 차게 파견되어 온 나는 코로나를 핑계로 그냥 좀 더 더운 한국에 있는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목요일 저녁이 되면 여느 직장인처럼 신나게 노트북 전원을 끄고, 아예 서랍 안으로 집어넣는다. 스크린은 그만 보고 싶지만 주말 동안 나의 웃음을 챙겨 줄 예능을 보기 위해 풀 충전된 핸드폰을 곧장 꺼낸다. 그렇게 나의 주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일’요일 저녁이 되면 새롭게 업로드되는 주말 예능이 나름의 일요병 임시처방제였다.


어느 11월 토요일, 그날도 일요일 출근을 잊기 위해 금요일 방영된 한국 예능을 보며 소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직 저녁 7 시인데 너무 부지런히 본 탓인지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한국에서보다 더 열심히 예능을 보고 있는 나… 창문 밖을 보니 거리에 사람들이 보였다 (여름에는 더워서 개미도 안 보이는 두바이다). 40도를 넘는 두바이의 여름이 가고 20도의 겨울이 왔구나. 11월 ~ 2월은 두바이 최고의 날씨라고 하던데, 저녁거리도 사야 되고… 밖을 한 번 나가볼까.


집 근처 마트까지 10분 정도만 걸을 생각으로 나갔는데, 2시간을 걷고 돌아왔다. 예능 한 편도 한 자리에 앉아서 쉬지 않고 2시간을 못 보는데 집에 돌아오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이 날 나로서는 역대급인 21,983 걸음을 걸었다. 누군가 나에게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으라고 하면, 난 시도 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나 많이 걸었지? 우리는 즐거운 일을 할 때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한다. 나는 두 시간 동안 걸은 것이 아니라, 동네를 바라보았다. 주황색 전등이 반짝 반짝이는 거리,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덩치 큰 남자 8명이 술이 아닌 콜라를 마시며 수다 떠는 모습, 그 옆 자리엔 누군가를 기다리며 히잡 사이 눈을 돌리는 여성들. 오랜만에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과 경치가 새삼 새롭고 신기했고, 그렇게 나는 발보다 더 빠르게 눈 운동을 하며 거리를 누볐다.


그동안 나는 예능을 보며 (See)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바깥세상을 바라보면서 (watch) 훨씬 더 새롭고, 기억에 남는 즐거움을 느꼈다.

예능을 보면서 일시정지를 하고 쳐다본 기억은 한두 번 있을까? 걷는 동안, 나는 거리의 사람들과 카페와 음식점들을 보느라 몇 번이나 눈을 멈추었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두바이에 와서 코로나와 더위를 핑계로, 중동 사람들을 보기보다 폰 안 작은 스크린으로 한국을 보며 시간을 보냈던 나.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시간을 확인 한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평범한 두바이의 거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고 나니, 일요일이 되면 현지 동료들을 바라보며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음 날 두바이에 온 후 처음으로 일요병을 겪지 않았다.


수동적으로 보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것에
나의 시간을 쏟자.


두바이에서의 늦었지만, 첫 번째 인생 깨달음이다.

이 첫 번째 글도 미래의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seen이 아니라 watched 되길 바라며

2021. 11월, 두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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