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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네 Oct 19. 2023

그냥 할랄 ‘라면’ 먹을 걸

라면을 위한 2시간의 열정

두바이 슈퍼마켓은 돼지고기를 팔지 않는다.

가끔 파는 곳이 있는데 가게 통로 옆 구석, 커튼을 제치고 합법적으로 숨겨진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외노자의 필수 음식, 라면도 마찬가지라 수출용 라면이 따로 있다.

한국 불닭면은 두바이에서 메인 매대에 행사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데 그날도 필리핀, 인도인들이 카레 불닭볶음면과 불닭볶음탕면을 집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40도 중동에서도 이열치열이 통하는 건가. 한 주를 마치고 지칠 대로 지친 나도 할랄 불닭볶음탕면을 집어 들었다. (*’ 할랄’이란 육식의 경우 이슬람식 율법에 따라 도살되어 아랍어로 ‘허용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할랄 불닭면은 그 방식이라기보다 고기 파우더 & 고명 등을 아예 뺀 ‘비건’에 가깝다고 한다.) 두바이에 와서 처음 사 먹는 라면이라 그런가, 맛은 비슷한데 뭔가 자극적인 1%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결국, 지쳐서 라면을 샀던 나는 지친 몸을 차에 싣고 한인 마트로 출발했다. 퇴근 시간이라 네비 예상 시간은 45분. 고민했지만 그 1%의 자극적인 맛을 위해 기꺼이 시동을 걸었다. 차는 생각보다 더 막혀서 1시간 후에야 마트에 도착했고 괜스레 피해의식으로 라면 10 봉지를 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밤 10시. 그렇게 나의 소중한 주말 저녁을 라면 10 봉지와 맞바꾸게 되었다. 심지어 그날 밤 끓인 라면은 3시간 전 먹은 할랄 라면이 아직 소화가 안되어 결국 다 먹지도 못했고, 나머지 9 봉지 중 8 봉지는 필리핀 친구에게 나눠줬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라면을 내 돈 주고 사 먹은 적이 없다.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라면을 위해 2시간을 쏟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시간 낭비 그 자체이지만 그때 한국 라면을 먹고 싶은 나의 열정은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는 최대치였다. 내 머릿속은 오직 라면에 대한 간절함 뿐이었다.


지난 1년 간 치열한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들었던 단어 중 하나는 ‘열정’이다. 회사는 물론, 서점에서도, 온라인 광고에서도 ‘어제 그 열정 어디 갔어요,’ ‘좀! 열정적으로!’ 하지만 내 생각에 열정은 너무 무책임한 말 같다.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실체 없는 단어이기에, 누군가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할 때 가장 쉽게, 있어 보이게 쓰는 단어가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 열정이란 가만히 놔두면 세상에서 가장 빨리 사라지는 존재다. 


두바이에서 한국 라면에 대한 열정은 다음 날 사라졌고, 매일 아침 책을 읽어야지 하는 나의 열정은 매일 저녁 사라졌다. 이렇게 연약한 존재를 믿고, 키우고, 의지하고, 이것만 있으면 된다니. 하지만 최근 라면을 보며 든 생각은 다행히도 열정이라는 이 아이는 사라지기 전 조금만 건드려주면 알아서 커지는 존재라는 것. 라면에 끓는 물만 부으면 한 없이 불어나는 것처럼.

원래 식탐이 크진 않지만 어쨌든 나는 그날 라면을 먹은 후 한국 음식에 대한 열정이 커져서 한동안 매주 한인마트를 갔고, 거의 꺼져가는 책에 대한 열정을 그래도 하루는 읽어보자 하며 건드렸더니 그 달에만 15권을 읽고 어느새 내가 글을 끄적거리고 있다.

 

어렸을 때 꿈을 기억하는가? 피아니스트, 아나운서, 댄서…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의 열정은 사라져 귀여운 추억이 된 것에 감사하면 된다. 지금은 지금의 꿈, 지금의 열정이 추억이 되지 않도록 사라지기 전에 꼭 한 번 건드려보면 어떨까? 유통기한이 임박한 순서대로.


시간보다 더 빨리 사라지는 게 열정이다.
있을 때 일단 그냥 써버리자



그나저나, 그 이후 더 커진 먹기에 대한 열정은 어떻게 할까… (라면 사건 그로부터 얼마 후 교촌치킨이 두바이에 론칭했다는 기사를 보고 왕복 70km를 달려 포장해 왔다ㅎㅎ )

때론 사라져야 할 열정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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