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물 살인사건
내 평생을 부산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타지로 이동하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초중고, 심지어 대학까지 부산에서 다니다가, 어느 날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하게 된 거다. 사투리 가득한 촌스러운 부산 여자, 상상이 가는가? 어벙벙한 내가 혼자 서울에서 버텨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 계약서를 쓰러 부동산에 갔는데, 집주인 없이 계약이 진행되었다. 지금 같았으면 당연히 집주인 얼굴을 보고 같이 도장을 찍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으니 이렇게 계약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집주인은 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에 전화가 와서는, 내가 부산에서 상경해 일하는 게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줬다. 여자 혼자 산다고 통창인 집에 블라인드도 달아주고, 한겨울에 보일러를 켜도 방이 냉골이라는 내 말에, 나 대신 관리실에 전화해서 문의도 해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친절한 집주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사한 지역은 살면서 처음 들어본 생소한 동네라 모든 게 다 어색했다. 집 주변에는 편의시설이 거의 없고, 부산에서는 늘 도보 5분이면 닿던 마트나 편의점, 다이소, 심지어 스타벅스조차도 없었다. 서울에 왔는데 오히려 시골로 좌천된 기분이랄까. 서울엔 아는 사람도 없어서 이사 온 후 몇 달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회사와 집이 같은 건물이라, 평일에도 주말에도 이 건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 집만이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내 안식처에서 참다못할 문제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우선 녹물 이슈. 부산에선 샤워기나 세면대에 더러운 물이 나온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고, 샤워기에 필터를 달 수도 있다는 것도 이 집에 와서야 처음 알았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이 물로 요리하고, 샤워도 하고, 온수로 세탁기도 돌렸다. 그런데 하얀 세면대에 물을 받을 때마다 노란빛이 감돌았다. 이 집의 화장실 조명이 살짝 주황빛이라 처음엔 조명이 물에 반사되어 노란빛이 도는 것인 줄 알았지만, 이게 알고 보니 녹물 때문이었던 거다! 어떻게 집에서 녹물이 나올 수가 있지...? 너무 놀라서 따뜻한 물과 찬물을 번갈아 틀어보니, 따뜻한 물에서만 노란빛이 났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전기온수기를 쓰면 온수기 안에 물이 고여 녹이 생길 수 있고, 그 녹물이 그대로 내가 쓰는 물에 나온다고 했다.
급히 집주인에게 연락했고, 집주인은 흔쾌히 새 온수기로 교체해 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온수기 업체에서 우리 집을 방문했고, 교체하던 중 기존에 달려있던 온수기에서는 엄청난 녹물이 쏟아져 나왔다. 예전 세입자는 어떻게 견뎠던 걸까? 온수기를 교체한 뒤 녹물은 일단 멈춘 듯했지만, 녹물을 한번 경험한 뒤로는 불안해서 샤워기, 세면대, 주방 싱크볼에 필터를 달았다. 그런데 이 비싼 필터가 일주일에 한 번씩 새카매질 정도로 녹물이 나왔다. 업체에 문의했더니, 새 온수기로 교체했기 때문에 온수기에는 문제가 없고, 오랫동안 온수기를 교체하지 않아서 배관에 쌓인 녹물이 나오고 있는 거라고 했다. 이 사실을 집주인에게 알렸지만, 필터를 사용하는 걸로 충분하다며 그냥 살라고 했다. 그때 이사했어야 했는데... 결국 이 집의 녹물과 함께 4년을 살아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철분 수치가 과다하게 나온다. 나는 철분제를 먹지 않아도 되는 강한 서울 여자로 성장했다.
전기온수기를 교체한 뒤에도 필터에 녹가루 같은 게 둥둥 떠다녔지만, 그냥 애써 무시하며 이 집에서 계속 버텼다. 원래 집에서 밥을 직접 해 먹다가, 필터를 본 순간 수도에서 나오는 물로는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든 음식에 들어가는 물을 생수로 바꿨지만, 쌀 씻는 물조차 생수를 쓸 순 없어서 햇반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세면대에 고인 물이 떨어지는 소리겠거니 했는데, 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잠들기 직전에 화장실을 확인하러 갔다. 그런데 웬걸, 화장실 바닥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천장 쪽 뚜껑을 살짝 들어봤는데, 천장 속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 너무 황당해서 일단 관리실에 전화를 했고, 관리실 아저씨가 사다리를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천장을 확인해 보시더니 천장에 설치된 전기온수기가 터져 물이 새고 있는 거라며, 집주인에게 연락해 다시 온수기를 교체해 달라고 연락하라고 하셨다. 아래 영상을 찍어 집주인에게 보내며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렸고, 결국 또다시 전기온수기를 교체하게 됐다. 내 피 같은 휴가까지 써가며 온수기를 교체해야 했는데, 다시는 이 일로 휴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4년을 버티고 버티다가 드디어 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