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현재는 과거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몽땅 펼쳐 보이고서는 과거를 완벽히 무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다. 살다보면 한사코 나의 것이 아니라 거부했던 어떤 것들이 삶의 일부가 되어있음을 확인하고 그 이질감에 새삼 놀랄 때가 있다. ‘록이 아니면 음악도 아니지.’ ‘맥주는 대체 무슨 맛으로 마실까?’ ‘운동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지? 아니, 왜 돈을 내고 몸을 고생시켜.’ ‘비거니즘은 아무나 못하겠군.’ 지금 나는 내가 과거에 부정했던 많은 것들과 함께 살고 있다.
세계를 평정하는 록커가 되고 싶었던 10대 시절엔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대학교 밴드 동아리에서 여러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며 재즈, R&B 등 다양한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됐다. 맥주는 오줌맛이 나는 탄산음료인 줄 알았는데 IPA를 맛보고 나선 한동안 맥주를 매일 같이 마시던 대학시절을 보냈다(물론 지금 이 글도 맥주를 마시며 쓰고 있다). 교단에 서고 나선 체력을 기르려다 운동 없이 못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요가와 클라이밍에 푹 빠졌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꼭 운동을 한다. 그리고 2019년 겨울부터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있다.
이 모든 현재 박지은 중 과거 박지은의 뒤통수를 가장 세게 때린 것은 비거니즘 지향인이 된 것이다. 수년간 내 비거니즘과의 심리적 거리두기 전략은 큰 기복 없이 꽤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비건 옵션이 널려있던 네덜란드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릿터 17호를 읽고도 철옹성처럼 굳건히 의무를 다하던 전략이다. 게다가 별 탈 없이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것을 삶의 미덕으로 생각했던 내가 육식이 범람하는 이 세상 속에서 비거니즘이라니. 미래 박지은은 현재 박지은의 뒤통수를 또 어떻게 때리려나. 현재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들을 나열해보면 신통한 점쟁이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내가 비거니즘을 실천할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돌이켜보면 여러 계기들이 있었다. 그 당시엔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된 줄 알았던 과거의 경험들이 알지 못한 새에 서로 맞물리며 돌고 돌아 지금의 이곳에 도착해있는 것이다. 수산시장의 수족관, 네덜란드에서의 6개월, 릿터 17호. 어쩌면 영영 놓치고 살 뻔한 그 복선의 끝자락을 대뜸 손에 쥐어주며 내 심리적 거리두기 전략을 대차게 망쳐버린 것은 2019년 가을에 시작한 동물권 독서모임이다.
교사는 아이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직업이지만, 타성에 젖기도 가장 쉬운 직업 중 하나일 것이다. 수업을 포함하여 반복적인 일을 많이 하거니와, ‘수업권’이란 이름 아래 내게 주어진 수업시간 50분만큼은 불가침한 자율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수업 준비를 소홀히 한다고 매 수업마다 참관해서 평가하고 혼내는 상사도 없고, 판매 실적처럼 나의 부족한 노력이나 능력이 고스란히 탄로나는 경로도 없다. 수업하다 갑자기 막혔을 때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아주 발전 없기에 딱 좋은 직업이다.
어느 날은 지문을 꼼꼼히 분석하지 않고 수업에 들어갔다. 분명 교무실에서 읽어봤을 때는 이게 정답인 이유를 확실히 알았던 거 같은데. 설명을 하는 도중에 스스로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짝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작 2년차에 노하우란게 생겨버린 나는, 내겐 아무 문제가 없고 이해를 못하는 여러분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버린 논리를 뻔뻔하게 나불거리고 있었다. ‘당장 멈춰, 박지은! 그냥 모른다고 해! 다음 시간에 제대로 설명해주겠다고 해!’ 내 안의 천사가 부르짖었지만 악마는 이미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니 정답은 3번인 거죠!”
말투와 눈빛만큼은 1타 강사였다. 공부 좀 하는 학생들이라면 다 이상하다고 느꼈을 법한 설명이었다. 몇몇 아이들이 날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별로 부끄럽지가 않은 것이다. 어느 순간 아이들의 차가운 눈빛을 견디는 그 “용기”가 내 안에서도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이라면 다들 소싯적 공부 꽤나 했던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공부를 나름 재미있어 했던 사람들이다. 전국의 모든 선생님들이 공감하겠지만 교단에 서고 나선 전공 과목 실력이 가르치고 있는 학년 수준으로 내려앉고, 쏟아지는 행정 업무로 공부를 제대로 할 시간이 많지 않다. 나 역시 바쁘게 1년차를 보내고 나니, 제대로 집중해서 공부를 해본 지가 까마득했고, 특히 글을 읽는 집중력이 물러져 몇몇 수능 지문은 한참을 들여다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지루하고 뻔한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 되어버리겠다 싶은 생각에 공부 근력을 다시 다져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고선 참여연대의 아카데미 느티나무, 말과활 아카데미 등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나 둘 씩 찾아 듣기 시작했다.
가을에 들을 강의를 찾던 중 아카데미 느티나무 강좌 목록에서 ‘동물권 독서모임 와 (W.A.-With Animals)’가 눈에 들어왔다. 강좌 부제에는 “육식인, 채식주의자, 집사 모두 모여라”라고 되어 있었다. 난 육식인이니 우선 합격. ‘동물권’이란 단어는 다소 낯설었지만, 그저 책을 읽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모임이라면, 한 달에 한 권을 밀도 있게 읽을 수 있도록 강제성을 주는 곳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렇게 세 달간 매월 둘째 주 금요일, 퇴근 후에 느티나무가 위치한 서촌에 갔다.
학교 워크숍 때문에 첫 모임에 불참했기에 나의 첫 출석은 11월 8일의 두번째 모임이었다. 느티나무의 간사이자 독서모임 멤버였던 환희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이름표를 나누어 주었다. “저쪽에 비건 김밥과 비건 빵이 있어요. 많이 드세요! 바나나도 있어요!” 비건 김밥과 비건 빵이라니! 처음 입에 넣어본 비건 김밥은 특별할 것 없지만 아주 맛있었다. 햄과 맛살을 덜어낸 자리에 달짝지근한 우엉조림이 가득 채워져 참기름의 고소함과 잘 어우러졌다. 비건 치아바타는 아주 쫄깃했다. 퇴근 후 배가 고팠던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주변 시선은 아랑곳 않고 간식을 입에 한가득 집어넣고선 모임 시작 직전까지도 우물거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책 이야기에 앞서 자기소개를 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이들은 반려동물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을 소개하였고 다들 아직은 부족함이 많지만 고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고기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의제에 서로 공감하고 있는 집단이라니, 아주 낯설었다. 그 중 한 명은 이미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처음 직접 만난 ‘비건’이었다. 그는 어릴 적 비글과 함께 살았는데, 비글이 사람을 잘 따르기 때문에 동물실험에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선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11월의 책은 클리프턴 P. 플린의 <동물학대의 사회학>이었다. 사회학적 접근으로 동물학대를 분석하고 동물학대 연구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었다. P. 플린은 동물학대를 개인적 차원의 일탈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문제로 정의하고 유의미한 분석 주제로 삼음으로써 동물학대와 인간폭력과 상호연결성을 들여다보았다. 동물학대와 인간폭력은 모두 자신보다 낮은 권력 관계에 위치한 이에 대한 폭력으로, 서로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었다. 동물학대 경험이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에 대한 폭력의 경험이 동물학대를 더 쉽게 만들기도 한다. 사회의 폭력을 걷어내기 위해선 인간의 폭력만이 아니라 동물학대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와” 사람들과 <동물학대의 사회학>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며 처음으로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동물을 포함시켜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물은 스스로 목소리도 낼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 약자들과는 또 다른 측면의 열악한 현실에 처해있었다. 아니, 이 세상은 동물들이 몸부림치고 목소리를 낼 지 언정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들어주지 않는 곳이었다[1]. 그동안 나름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회”는 언제나 인간들만의 사회였다는 점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우린 쉬는 시간에 비건 김밥과 빵을 열심히 먹으며 “소이로움”을 비롯해 서촌 주변에 있는 비건 식당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누군가 인사동의 “오세계향”이 맛있다고 추천하였고, 바로 번개 담당자를 정해 12월의 모임을 약속하였다. 사람이 많은 곳을 되도록 피하는 편이지만, 동물권에 대해 이제야 처음 생각하고 누군가와 얘기해본 것이었지만, “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릿터 17호를 읽었을 때 종차별주의를 깊이 생각하면 나의 모든 일상이 흔들릴까 두려웠지만, “와” 사람들은 동물에 대해 읽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삶과 시선을 기꺼이 흔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사람들이 여럿이니 든든했다. 나 역시 한껏 흔들려봐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독서 모임이 끝날 무렵, 미리 정해 놓은 커리큘럼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며 다음에 읽을 책 함께 추천하여 투표로 정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비거니즘과 동물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처음 들어본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육식의 성정치>, <동물 홀로코스트>,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해러웨이 선언문>.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들이 후보에 올랐다. 카톡 투표 결과 12월의 책으로는 <동물의 권리>가 선정되었다. 후보에 올랐던 다른 책들도 모두 읽어보고 싶었다. 두 달만에 내 일상이 얼마나 달라질 지 전혀 모른 채 말이다.
[1] 수나우라 테일러는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voice for the voiceless”라는 구호를 비판하며 인도의 정치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목소리 없는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침묵을 강요받았거나, 듣지 않으려 하기에 들리지 않게 된 자들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