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쾀 Mar 18. 2017

보름달만 보면 소원 비는 남자

난 보름달 사진만 봐도 소원을 빈다.

"어 보름달이다. 소원 빌어야지."


내가 뱉은 한 마디에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마치 교회 목사가 된 기분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나도 서둘러 두 손을 마주 잡고 소원을 빈다. 오늘 뜬 보름달은 평상시 뜨는 보름달과는 다른 '슈퍼문'이란다. 크기가 더 큰 만큼 내 소원을 잘 이뤄줄 것 같다. 보름달에게 비는 소원은 그때그때 달라진다. 항상 원하는 것이 달라져서 그런가. 너무 큰 소원을 빌면 안 이루어질 것 같아서 적당한 걸로 골라다가 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소원으로. 


일종의 징크스

어렸을 때부터 난 소원 비는 것을 좋아했다. 징크스도 많았고, 걱정도 많았다. 학교에서 시험이 시작하기 전에는 돼지 모양 목걸이(내가 돼지띠이다)를 챙겨서 두 손에 꼭 쥐고 소원을 빌었다.  제발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오게 해 달라고. 실수 없이, 억울함 없는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럼 설사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더라도 공부를 덜 해서 그랬나 보다고 생각해서 억울하진 않다. 만일 목걸이를 잊어버리고 시험장에 갖고 오지 않으면, 소원을 빌지 못해서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할게 분명하다. 그래서 난 아직도 시험 볼 때마다 잊지 않는다. 내 돼지 모양 목걸이를. 


보름달에 집착하게 됐다

시험 전날에 베개 밑에 공부한 책을 넣어두고 잔다던지, 돼지 모양 목걸이를 챙겨서 시험장에 간다던지, 다양한 징크스를 갖고 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하늘에 둥그렇게 뜬 보름달이다. 내가 보름달에 집착하게 된 것은 아마도 중학교 때부터였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였을까, 정월 대보름날 여느 때와 같이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그때 난 짝사랑하던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소원으로 그 여자아이와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설렘으로 부푼 가슴을 갖고, 며칠이 지났을까, 우연인지 난 그 여자아이와 사귀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땐 목표하던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정말 이뤄주었다. 내가 물론 열심히 구애하고, 공부했기 때문에 이룬 성과였겠지만, 보름달의 효과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본다. 모든 일엔 '행운'도 필요한 법이니까. 그래서 난 보름달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소원을 빈다. 정말 보름달이 소원을 이뤄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보름달에 대한 집착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혹시라도 날씨가 좋지 않아 구름이 잔뜩 끼는 날에는 소원을  빌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그냥 우울해지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보름달 사진이라도 찾아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그러면 실제 보름달은 아니지만, 기분은 훨씬 나아진다. 스크린 보름달도 실제 밤하늘 보름달만큼 밝으니까 효과는 있겠지 하고 말이다.  


기분 좋은 집착.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는데도 멈출 수가 없다. 사실 보름달에 소원을 비는 게 뭐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소원 비는 게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고. 그냥 보름달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잠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정도이다. 보름달에 소원을 빌어서 그 소원이 이뤄지면 '땡큐'아닌가. 그래서 한심하지만 바꾸진 않을 것이다. 보름달에 소원 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면 마치 로또를 사는 기분이다. 혹여나 소원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설렘을 안고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다음 보름달은 언제 뜰까. 우연히 밤하늘을 쳐다봤을 때 만난 보름달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져서 굳이 인터넷으로 알아보지 않는다. 얼마 전에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었으니 아직 뜨려면 시간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내가 빈 소원들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하며, 다음 보름달을 기다려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기에 물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