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1년에 한 번,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송년회 자리. 코로나가 사람들 거리를 조금 더 떼어 놓기 전부터 각자의 삶에 전력투구하느라 자주 보지 못하던 친구들 얼굴이, 썰려서 접시에 담긴 북경오리 살점만큼 낯설다. 처음 먹어보는 베이징덕은 왜 그리 유명한지 이유를 모르겠더라. 중국집은 역시 짜장과 짬뽕이지. 호사를 누리려면 볶음밥에 탕수육 정도? 내 안에는 아직도 어릴 적 그런 정서를 가진 아이가 살고 있는데, 중년의 무게를 그려 넣은 얼굴들이 그 시절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맞은편에 앉아 있다.
음식 접시가 몇 순배 도는 사이 살아낸 얘기들이 섞여들었다. a는 작년 9월 평생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당하고 올해 8월 신장 암을 얻어 한쪽 신장을 잘라냈다며 대수롭잖게 웃었다. b는 스물 중반 딸년이 결혼할 남자라며 부산 놈(?)을 데려와 인사시키는 바람에 적잖이 당황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 쓴웃음을 지었다. 5년 만에 나타난 c는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들 얼굴을 두리번거리며 그간 밀린 소식을 업데이트하느라 바빴다. 갱년기 증상과 우울증 덕분에 무기력, 무관심, 신경질이 많아졌다는 d는 얼마 전 기술사 자격증을 땄다며 살짝 뿌듯해했다. 코로나 덕분에 개점 휴점 상태인 영화감독 e는 새 아이디어를 들고 와서 ‘너, 빨리 유튜브 해! 하면 무조건 대박 날 거야’라는 희한한 권유를 고장 나 튀는 lp 판처럼 반복 재생했다. 퇴근 후 천체물리학 공부에 빠져 있다는 f는 대학 교과서를 펼쳐 놓고 함수 문제를 풀 때 너무 행복하다며 웃었다. 허블 망원경을 대체할 11조짜리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얘기를 전할 땐 '과학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타를 배우겠다는 g는 코로나가 끝나면 내년 크리스마스에 영화음악 하는 b네 집에 모여 기타 연주회를 열겠다는 공약을 했다. b는 드디어 직장인 밴드(b만 직장인이 아니다. 응?)를 결성했다며 큰 앰프에서 기타 소리를 들을 생각에 설렌다고 했다.
각자 사는 이야기 끝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 h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아직 그 상황에 직면하지 못한 나이에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읽으며 서글퍼했는데, 시적 화자의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도 그 서글픔은 매한가지 같았다. 세밑 분위기를 내려고 음식점 앞 아케이드에 세워 놓은 크리스마스트리는 흥성스럽기커녕 포토샵으로 만진 사진처럼 가짜(비현실적) 같았다. 그래도 무언가 반짝거리는 게 있어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집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기다리며 d가 자기 카톡 프로필 화면을 보여줬다. 몹시 힘들어 바닥이 보이지 않을 때, 내가 페북에 올린 나쓰메 소세키 글을 우연히 보고 마음에 와닿아서 옮겨 적었노라고. 친구의 그 말이 다시 내 마음에 와닿았다. 우리는 각자의 보폭과 속도에 맞춰 자기 길을 가고 있지만, 이렇게 종종 만나 '따로 또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확인할 수 있어서. 소세키의 글을 여기에 옮긴다. 우리 모두 파이팅!
'이지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 <풀베개> 中, 나쓰메 소세키
아무튼 나는 토요일에도 출근 중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