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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디이 Oct 11. 2023

빅애플, 뉴욕에서의 여행과 생활은 다르다

사실은 고담시티(Gotham City)의 연장선일까

    2010년도 뉴욕, 맨해튼 (Manhattan)으로 처음 나 홀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딱 10년 후, 2020년 뉴욕, 맨해튼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기차역인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 (Grand Central Station),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양식을 연상시키는 보자르 (Beaux-Arts) 건축물이 왠지 가슴을 뛰게 한다


프롤로그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인 도시중 하나이자 돈만 있으면 거의 뭐든지 할 수 있고 살 수 있는 뉴욕은 빅애플 (The big apple)이라는 애칭을 가진 누구나 다 아는 관광명소이다. 10년 전 뉴욕여행에서 나는 한국에서는 인지하기 못했던 수많은 취향을 찾았다. 첼시 (Chelsea) 지구에서 우연히 발걸음을 옮긴 갤러리에선 미국의 근대 팝아티스트인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의, 아마도 한국에서는 한참 뒤에나 볼 수 있을, 입체적인 최신작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고, 게스트하우스의 일본인 룸메이트가 알려준 뉴욕 필하모닉 (New York Philharmonic) 여름 정기 공연에선 내가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인 거쉰 (George Gershwin)의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가 귓가에 꽂혔다. 비를 쫄딱 맞은 뒤 덜덜 떨며 프렌치 스타일 양파 수프 (미국에서 제일 흔하게 먹는)를 먹은 후 센트럴 파크 풀밭에 앉아 어떤 곡을 연주할까 기대하고 있다가 들었던 그 경쾌한 클라리넷 도입부 선율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할 정도이다. 그땐 몰랐지만 이젠 뉴요커 (New Yorker)가 되었고, 마치 로컬인 것처럼 내가 사는 뉴욕의 작은 섬인 맨해튼을 더 시티 (The city)라고 부르게 되었다.


거의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뉴욕 필하모닉의 센트럴 파크 야외 여름 정기 공연, 모두가 피크닉 온 것처럼 수다도 떠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이 도시는 유학 생활동안 나의 짧은 일탈과 도파민 충족을 담당하는 숨구멍이었다.


     문화생활을 즐기는 생활 습관도 도시가 주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고방식도 온전한 서울 사람이었던 나는 옥수수밭이 펼쳐진 한적한 교외의 작은 캠퍼스 타운에서 점점 집-학교-집만을 오가는 시골쥐가 되어 갔다. 그럼에도 때때로 도시의 번잡스러움이 그리워 뉴욕에 여행 갈 때면, 공기부터 다름을 느꼈다. 온 거리가 문화와 예술에 대한 필요를 채워주고 내 감성을 다시 숨 쉬게 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가 되어 미국 내 취직을 고민할 때, 나는 다짐했다.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 듯 무조건 뉴욕에서 살고 싶어를 외치게 된 것은, 아마도 10년 전 짜릿했던 뉴욕과의 첫 만남 때문이었을 것이다.



10년이 지나도 뉴욕에 대한 나의 콩깍지 또한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State)와 주 사이 경계를 넘어서는 이사는 참 쉽지 않았다.


     코비드 (COVID-19)가 한 차례 쓸고 지나간 2020년 겨울의 뉴욕, 이사를 도와준 친구와 함께 타임 스퀘어 (Times Square)를 차로 한 바퀴 도는 데 낯선 풍경이 창문에 주룩주룩 맺혔다. 

유난히 비가 내리던 뉴욕 입성하는 날


광고판에 광고 대신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라는 그래피티가 희망적이라기 보단 토해내는 절규와 같이 들려서 안타까웠다

비가 내리는 거리, 그런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날씨와 상관없이 언제나 명동 한복판처럼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모이던 그 거리가 쓸쓸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70-80년대 범죄가 횡횡하여 고담시티로 불렸던 뉴욕의 과거를 살짝 엿보는 느낌이었다. 코비드로 지난 몇 달간 사망자가 뉴욕 시티에서만 몇 만 명이며 사람들이 두문불출하여 동네 레스토랑들이 점점 문을 닫고 있다는 기사가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누군가는 이미 떠나버린 도시에서 나는 뉴욕살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사한 아파트는 엘리베이터도 있고 겉으로 보기엔 아주 멀쩡한 건물이었다. 도어 투 도어 (Door-to-door)로 30분이면 직장에 도착할 수 있어서 결정했다. 어퍼 웨스트사이드 (Upper West Side)와 할렘 (Harlem)의 사이에 있고 센트럴 파크 (Central Park)도 걸어서 갈 수 있고 직장도, 다운타운도 지하철인 트레인 1 (Train 1)을 타면 금세 갈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나는 그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코비드 때문에 곧 내 방에서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고, 더불어 아시안 혐오 범죄 (Asian hate crime)이 횡횡해서 일과 시간이 끝나는 저녁 시간대에 뉴욕 거리를 돌아다니기가 꺼려졌던 탓이다.


    여행을 다닐 때는 뉴욕 거리가 이렇게 지저분한지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내 생활 반경이 되니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최근 몇 년 간 많이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화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각종 사건이 리포트되는 할렘과 꽤나 가까운 편이었다. 동네의 작은 공원에서는 종종 살인 사건이 보고되어 밤에는 절대 가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미국의 공원은 우리나라와 달리 밤에는 조명이 많지 않고 인적도 드물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도 주변이 캠퍼스 타운이라 안전한 편이었으며 아파트에는 아시아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이 사는 동네는
웬만하면 안전한 편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유독 우리 아파트 앞 골목에선 항상 거리에서 무리 지어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시시덕거리고 있는 히스패닉 혹은 아프리칸 아메리칸 계열의 그룹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사이를 지나 여자 혼자 다니기는 불편한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이는 비단 내가 특정 유색 인종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지하철과 사람 많은 다운타운에서도 버젓하게 행해지던 아시안을 타깃으로 한 혐오 범죄에 대한 잠재된 두려움과 뉴욕에서 누적된 경험치 때문이었다. 뉴욕 거리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먼저 알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주변 경험자들 (캣 콜링은 기본이고 뺨을 맞거나 가방을 뺏긴 이들도 있었다)의 조언도 한몫했다.



해가 지면 반짝거리는 별같은 도시 숲은 그 사이를 지나 다니기에는 위험하게 느껴졌다

    뉴욕 어디를 가더라도 길 가에 누워있거나 앉아 있으며 돈을 바라는 홈리스 (Homeless)들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화를 내고 있거나 말을 거는 정신질환자들이 눈에 띄다 보니, 자연스레 길에서 서성이는 사람들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고 빠르게 피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영화나 뮤직 비디오에서 보면 멋있을지 몰라도 매일 뉴욕 거리를 걷는 현실은 달랐다.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옛날 도박용 주사위 게임 (영화 '그린 북'에서 토니가 다른 운전사들과 하던 것으로 스트릿 다이스라 부른다)을 하고 있는 왁자지껄한 무리를 마주치면 순간 싸한 식은땀이 흐른다. 가뜩이나 조심스러운 내 성격에 누군지도 모를- 하지만 근처 대학생은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치는 것은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걷기 좋게 설계되었다는 뉴욕은 여전히 걸어 다니기 위험한 동네들이 존재하며 범죄율이 높은 도시 중 하나이다.




    내가 원할 때 바로 주변 병원에 워크인 (Walk-in)으로 바로 진료를 받는 것은 마치 마켓에 장 보러 갔다가 우연히 유치원 동창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내가 사러 가고 있었던 립스틱을 선물하는 확률과도 같다. 즉,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부분들에서 뉴욕 생활 인프라의 관리 부재의 단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더욱더 계획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미국도 한국처럼 처방약을 받으려면 의사를 만나야 한다. 이때 보험에 따라 다르지만, 30달러 정도 혹은 그 이상의 기본 진료비인 코페이(Co-pay)를 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도시의 병원 예약은 항상 차 있기 마련이었다. 대신 최근에는 텔레닥 (Teledoc)과 같이 원격 진료가 가능한 범위가 넓어졌고 보험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비용이 코페이와 거의 비슷해서 급할 때는 종종 애용하곤 했다.


외국에서 혼자 살 때 가장 서러울 때는 바로 아픈데 나 혼자 있는 순간이다.


    한 번은 리모트 진료를 받고 CVS와 같은 드럭스토어 (Drug store)로 약을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미국은 편의점과 약국, 마켓이 합쳐진 생활형 약국을 드럭스토어라고 부르며 프랜차이즈화되어 있다). 처방전을 드럭스토어로 직접 보내준다고 하여 집 근처의 드럭스토어 내 약국 주소를 알려주고, 몇 시간 뒤에 약을 받으러 갔다. 내 차례가 되어 약사에게 물어보니 현재 내가 처방받은 약이 없다고 했다. 헛걸음을 하고 다른 약국에 전화로 문의했지만, 또 그 약이 없다고 했다. 몇 번 전화를 돌리고 나서야 처방전 약이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증상에 필요한 흔한 약이고 처방전이 있는데도 약을 받기 어렵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내가 크게 아파서 움직이기 조차 어려운 상황이라면 어땠을지, 지극히 현실적인 걱정마저 들었다.


    또 어느 날엔 이런 불편함에 대해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할 생각이 없는 태도에 대한 당황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다른 드럭스토어 브랜드인 월그린 (Walgreens)에서 작은 포스터를 뽑기 위해 스토어 픽업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 미리 웹사이트에서 주문하고 이메일 연락이 오면 지점을 방문하여 프린트된 사진이나 포스터 등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메일 알림이 와서 가보니 주문했던 포스터가 없었다. 직원에게 문의하니 태연하게 지난 3개월 간 프린터가 고장 나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미안하단 말도 없었던 건 둘째 치더라도 (맨해튼에 살다 보면 그러려니 하게 된다) 애초에 웹사이트에서 프린트가 고장 나 있었던 지점으로 프린트 주문이 가능했던 것과 나오지도 않은 포스터를 픽업하라며 알림이 온 것, 그 지점에서 미리 대처를 하지 않은 것 등등 모든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이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미국에서 인구 밀도 1위로 1당 2만 6천여 명이 살고 있는 맨해튼답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엔 수요가 몰리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생활 인프라의 공급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걸 몇 번이나 경험하게 되니 나 스스로가 미리미리 챙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거나 확인하더라도 상대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불이익이 생긴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인 것이다.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맨해튼이라 행복하다고 여긴 건, 이 도시만이 가진 매력 또한 그만큼 뚜렷하고 다른 곳에서 누리지 못하는 뉴욕 시민으로서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욕하는 뉴욕 시티 택스를 내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10년 전에는 혼자서 잘만 다녔던 뉴욕의 밤거리가 이제는 많이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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