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내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Mar 12. 2019

나흘 만에 샤워했다, 다리 한 짝 벽에 올리고.

이 글은 저온화상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인간의 대표적인 3대 욕구로는 수면욕, 식욕, 배설욕이 있다. 배설욕 대신 성욕을 넣는 경우도 있다지만 결혼은커녕 연애도 엄두 내지 못할 시대에 웬 사치. 4대 욕구로 범위를 넓혀 보면 넣어줄 수도 있겠다만. 말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보자. 당신이 3+1 욕구로 하나 추가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나는 단연 청결욕을 꼽겠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샤워를 못 했다. 오늘로 나흘째 머리만 겨우 감는다. 아무리 씻는 것도 귀찮아하던 나라도 이쯤 되면 몸이 근질근질하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고 정말로 몸이 간지러운데, 어쩌다 이 지경이냐고 물어보는 친절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전제 하에 썰을 풀어 보겠다.


  시작은 금요일 아침 내가 내지른 괴성이었다(뭐어?!). 밤새 뒤척이다 무릎까지 걷어진 잠옷 바지 아래 보이는 왼쪽 종아리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말이 좋아 물집이지 통키가 던진 불꽃슛이라도 맞은 양 무시무시한 붉은 무늬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가히 괴기스러웠다. 어제까지 멀쩡했는데 이게 웬 거지?


  원인은 뜨거운 물을 담은 물주머니였다. 종아리 아래 뜨끈한 물주머니를 두고 온찜질을 하다 나도 모르게 잠들어 화상을 입은 거였다. 이미 차게 식은 물주머니에 의미 없는 주먹질을 하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은 2도 화상이라며 물집을 째고 소독을 해 주셨다(아악!!). 앞으로 일주일은 물이 닿으면 안 되니까 샤워를 못할 거라는 말씀과 함께.


  처음 이틀은 살만했다. 손, 발, 머리카락은 깨끗하니 스스로의 더러움을 자각할 계기도 없었다. 그런데 이틀째 되는 날 저녁부터 피어난 몸 구석구석 뾰루지들이 사흘째부터는 대놓고 무르익는 거다. 매일 밤 물티슈로 여기저기 닦아냈던 건 세상 쓸모없었나.


  눈 딱 감고 병원 문 여는 월요일만 기다렸다. 몇십 년 만에 월요일을 반갑게 맞은 건지 모르겠다만 기다린 그 날은 여느 때처럼 슬그머니 찾아왔다. 칼퇴하고 집에 가는 길 만원 버스 속에서 뒤척이며 행복회로를 풀가동했다. 그래도 이제 상처 많이 나았겠지, 운 좋으면 메디폼 같은 거 붙이고 샤워할 수 있지 않을까.


  헛된 희망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붕대를 풀어내니 토요일까지만 해도 나아가던 상처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혹시 주말에 많이 걸었어요? 지금 물집이 잡힐 단계는 아닌데."

"네 좀 답답해서... 혹시 걸으면 안 되는 거였나요?"

"...허허 다리에 화상을 입었는데 많이 걸으면 당연히 안 좋죠. 물집 터뜨릴게요."

"(끄악)...앞으로 안 걷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이번 주 금요일쯤 습윤밴드를 붙이면 샤워를 할 수 있을 거고 그게 지금의 일차적인 치료 목표라 말씀하셨다. 곧 여름인데 다리에 흉 지면 안될 테니 잘 낫게 해 보자는 말씀은 감사했지만 이번 주 매일매일 병원에 오라는 초대는 썩 반갑지 않았다. 매일 내는 병원비 만삼천오백원이면 맛난 점심 먹고 비싼 커피 마시는데.


  최대한 다리를 쓰지 않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많고 많은 생각들이 마음을 뒤집어놓았다. 돈 쓸 일이 어쩜 이리 많은지 이번 달 적금도 포기해야겠네, 다음 주에 내 옆자리 입사동기가 퇴사한다지, 사흘 전부터 어지러운 건 역시 스트레스 때문인가 보다. 도저히 이런 기분으로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동네 친구들과 밥 먹을 약속도 취소하고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에라, 샤워를 했다.


  한반도를 강타한 미세먼지와 내 머릿속을 강타한 미세고민에는 해결책이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구석구석 깨끗이 씻어내는 것. 천 원에 백 장 들어있는 부엌용 비닐봉지를 한 장 휙 꺼내 가위로 잘라 넓게 펴냈다. 그걸 왼쪽 다리 상처 위에 친친 감고 테이프로 둘렀다. 옷을 벗어 개어 두고 심호흡을 했다. 휴.


  화장실로 들어가 기합을 내뱉으며(으랶!) 왼쪽 발을 위로 쫙 찢고 한쪽 벽에 갖다 붙였다. 요가 일 년 반 필라테스 여섯 달 경력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오른다리와 왼다리의 각도는 약 115도. 샤워기를 틀어 몸을 적셔본다. 왼쪽 종아리엔 물이 가지 않는다. 성공! 바디워시 거품을 내고 호다닥 씻어내는 데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타월로 물을 잘 닦아내고 왼다리를 조심조심 바닥에 내렸다. 비닐봉지를 뚫어낸 물방울은 없었다. 진짜 성공! 휴휴.




   왜냐고 물으면 설명할 길 없지만 꼭 필요한 시간이 있다. 나 혼자 조명 켜 두고 널브러지는 긴 밤, 구석구석 거품 내 샤워하기, 교훈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잉여로운 글쓰기. 이런 시간이 한순간의 실수로 없어져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이번에 처음 했다면 코딱지 절반만큼의 억지 교훈이 되는 걸까.


  뭐라도 잉여롭게 쓰고 싶은 오늘, 내가 소재로 고른 건 영화 속 명장면이 아니라 삼류 시트콤 한 꼭지다. 이런 게 인생일 수도 있지 뭘. 뭐라도 포장해 보려다 다음 글로 미루기로 하고 마침표를 찍는다(쾅).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올해는 내일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살아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