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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양 Dec 26. 2017

우리의, 첫, 한라산

너굴양 제주살이

우리의, 첫, 한라산

제주 생활 6개월차,
슬슬 서울로 올라갈 준비도 해야하는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한라산에, 가지 않았다.

크흥...

한라산에 간 게 언제던가... 10년은 된 것 같다.
그나마 부모님이 산에 많이 다니시고, 나도 체력이 좋아 따라다녔던 그 때,
무더운 여름에 성판악 코스를 올랐고 정말 운 좋게 한 번에 백록담을 봤다.
그래서 그런지 미련(?)이 없었는데

거의 매일 한라산을 보는 곳에 있다보니 왠지 모를 의무감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 다녀올 때 겨울 등산화와 옷가지를 좀 챙겨왔다. 혹시~나 하면서.
눈 쌓인 오름을 오를 때도 등산화가 편해서 여러번 신기도 했고...

어디서 '설경은 영실코스'라는 말을 주워듣고 우리는 정말 바보같이(갈수록 왜 바보인지 알게됨)
영실코스를 조사해 가기로 했다. 

2017년 12월 19일 등반했고, 큰 눈이 두 번 정도 내린 다음이었다.

알고보니 영실코스는 가파른 구간 1시간이 있어 실족할 위험도 컸고,
겨울산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고려하지 않아 중간에 너무 힘들었다.

한라산 탐방로는 총 7개, 그 중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코스는 2개(성판악, 관음사)다.
폭설 등으로 통제하는 날도 있으니 한라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탐방로 운영 여부를 확인하고 가는게 좋다. 실시간CCTV로 주요 포인트 상태 확인도 가능하다.



영실코스는 매표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눈덮인 길을 다시 도보 혹은 택시로 올라야한다. (한 차에 편도 1만원)

택시 기사님한테 들어보니 매표소부터 진입로까지는 도로교통공사가 관리하는 '도로'가 아니라서 제설작업이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제설차가 있긴한데 늘 고장나 있고, 진입로는 도보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긴 구간이라 제설차 한 대로는 어려워보였다. 그리고 국립공원이라 생태계 보존 때문에 도로에 좋지 않은 염화칼슘을 매일 같이 뿌릴 수도 없다고 한다. 물론 눈이 녹으면 진입로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다.

날씨는 제주지방기상청에서도 체크할 수 있는데, 제주는 '오름날씨'도 알 수 있다.
한라산은 정상만 알 수 있는데, 해발이 높아 아래는 맑아도 위에는 눈보라가 치는 날씨가 될 수 있다.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무모하기도 했다.
몇 년 만의 설산, 짝궁은 처음인 겨울산.
한국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을 겁도 없이, 올랐다.

한라산 영실코스 오백나한
처음엔 웃었지...


영실코스는 총 5.8㎞로 영실휴게소에서 윗세오름까지 3.7㎞,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까지 2.1㎞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실관리사무소(매표소)가 해발1000m라고 한다. 1100고지 올라가는 중간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에 있다. 여기서 위에 말한 2km 정도의 택시 구간이 나온다. 

영실코스를 본격적으로 가는 영실휴게소는 해발 1,280m다. 윗세오름이 해발1,700m, 여기서 보통 한 번 쉬고 남벽분기점(해발 1,600m) 까지 간다. 영실휴게소에서 출발 하면 남벽분기점까지 2시간 반의 코스라고 하는데, 날씨와 본인 체력에 따라 물론 달라진다. 

우리는 영실코스로 올라가 하산도 영실로 했다. 돈내코와 어리목탐방로로 하산할수도 있다고 한다.

영실코스에서 힘든 구간은 사실 영실분화구 능선(해발1300m ~1550m)이다. 영실휴게소를 출발해 오백나한과 병풍바위가 보이기 시작하는 구간 정도. 거기부터 1600m 지점까지는 비교적 편했다.

그리고 나머지도 편한데...편하다는데...

한라산 영실코스 등반하는 너굴양 (사진 이힘찬)


오르막 구간, 소위 산쟁이들이 이야기하는 '고바위''깔닥고개'라는 급경사 구간에서는 사진을 못찍었다.
오랜만에 산행이고 요즘 운동을 너무 안해서 정말 힘들었다.
아직도 종아리가 아프다 흑흑...

한라산 영실코스 등반하는 너굴양 (사진 이힘찬)
한라산 영실코스 등반하는 너굴양 (사진 이힘찬)


정말 헉헉대면서 갔다.

짝궁은 컨디션이 좋아 나중에는 내 가방까지 들어주었다.
죽을것 같아도 카메라 들이대면 일단 웃었다.
남는건 사진여...

한라산 영실코스 오백나한바위
한라산 영실코스 오백나한바위


고바위 구간을 지나면 영실기암-오백나한과 병풍바위가 펼쳐진다.
안개를 뚫고 보이는 기암절벽은 정말 멋졌다.


한라산 영실코스에서 너굴양 (사진 이힘찬)
한라산 영실코스에서 너굴양 (사진 이힘찬)


몇 번을 쉬었다 가기를 반복, 기암절벽 구간을 지나 설경이 흐드러진 곳으로 접어들었다.
해발 1,600미터 구간을 지났다.

이 때 하산하는 두 분을 만났는데, 두 분다 뻥쟁이였다.
산에서 '얼마 남았냐'는 질문을 한게 바보였다.
언제 어디서 물어봐도 그 분들의 답은 한결 같다.
'얼마 안남았어요...한 10분?'

ㅠㅠ... 아저씨 미오...


한라산 해발 1600미터 표지


병풍바위를 지나면서 눈보라가 심해졌다.
여길 지나면,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며 올랐다.


한라산 영실코스
한라산 영실코스 (사진 이힘찬)


가끔 운동화 바람에 부유하듯 산을 타는 등산객을 몇 마주쳤다.
사실 영실코스는 위험한 구간이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데...
그날 같은 날씨에 무사히 돌아왔다면 다행인데, 정말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체력빨로 그렇게 등산하는 사람들 부럽긴한데, 너무 위험하다)


아무것도 안보인다


한라산 영실코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촬영 이힘찬)


설경 구간! 상고대(나무서리)가 멋지다
이걸 보고 크리스마스 소품을 만들었겠지;
한라산 영실코스의 상고대와 아련한 짝궁님
한라산 영실코스 (사진 이힘찬)


이날 윗세오름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유는.
눈.보.라

원래 선작지왓에서 남벽분기점까지는 날씨가 굉장히 변화무쌍하다고 한다.
겨울산의 변수는 정말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원래 산과 바다의 날씨는 많이 다르지만, 이날 한라산 외에는 날이 다 좋았다.
(그 다음날이 훨씬 좋았다. 이날 올랐어야 했지...ㅠ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선작지왓 부근 (사진 이힘찬)


선작지왓 부근부터 눈보라가 휘몰아치더니 눈 결정들이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종아리까지 푹푹 패이는 눈 때문에 내가 앞으로 가는건지 마는건지 헷갈리기 시작하고 다리도 풀렸다.
너무 힘들어 걷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던 그 때,
안개속으로 멀어지는 짝궁의 뒷모습을 보며 덜컥 겁이났다.

한라산 영실코스 윗세오름 부근 (촬영 이힘찬)


아마 한라산 중산간 지역을 운전하다보면 한번쯤 짙은 안개를 만날 것이다.
10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꽉 찬 안개속을 기어가듯 내려올 때의 그 막막함.
내 발로 걷고 있고, 앞뒤로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는데 시야에는 아무도 없다.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하산할 체력도 남겨두어야 했다. 다리가 풀려 실족하면 정말 위험한 코스.

짝궁도 겨울산이 처음이라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털이라는 털에는 눈이 얼어붙었다 (사진 이힘찬)


안에서는 땀이 나고 밖으로는 눈보라가 쳐 땀이 식으면 무척 위험하다.
특히 하산길에서는 체온이 내려가 땀에 젖은 모자나 넥워머, 장갑, 양말 등은 뽀송한걸로 바꿔 끼는 게 좋다. 취미 등산 20년 구력 우리 김여사 말 듣고 다 두개씩 챙겨갔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윗세오름 휴게소는 파업중이라 (임금체불이 이유란다. 참나...) 쉴 곳이 마땅치 않아 바람이 차단된 곳을 골라 주섬주섬 모자와 장갑을 갈아꼈다.

짝궁은 앞머리가 눈에 얼어붙어 부러졌다. 헐...

초코바를 우물우물 먹으며 하산하니 체력이 조금 돌아와 사진을 찍으며 내려갔다.


한라산 영실코스, 내려올 때는 웃을 수 있었다 ㅠㅠ (사진 이힘찬)
한라산 영실코스
한라산 영실코스의 까마귀


한라산 영실코스 설경
한라산 영실코스 설경
북유럽 사진작가 느낌의 짝궁
북유럽 사진작가 느낌의 짝궁


하산길은 어렵지 않았다. 고바위 구간은 오히려 나무가 많아 바람이 차단되어 훈훈했고, 사진을 찍으며 조금씩 내려오니 웃음도 나왔다. 엉엉 울며 기어가던 선작지왓은 이미 아련해지고...

그래도 체력을 남겨놓고 내려와 다행이었다.

한라산 영실코스 (사진 이힘찬)
한라산 영실코스 (사진 이힘찬)
한라산 영실코스 휴게소, 왕좌의 게임이 나오는 위어트리와 장벽 같다... ㅡ,.ㅡ;;;
한라산 영실코스 설경
한라산 영실코스


하산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숙제를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흠모하던 한라산 속에,
산 밖에서 보이는 설경 속에 들어갔다왔다.

다치지 않고 큰 일 없이 잘 다녀온 것도 감사했다.
산은 한 번에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처음에 백록담을 본 게 이 무모한 산행을 결심한 이유였을지도)

다음엔 더 잘 준비해서 다녀와야겠다.
아, 일단 운동 부터 좀...


한라산 설질이 히말라야와 비슷하다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ㅠㅠ (사진 이힘찬)
나를 따르라!? (사진 이힘찬)
눈 속에 파뭍힌 제주감귤 (사진 이힘찬)


산에 오르기 전에 초코바와 물을 챙겼는데,
짝궁이 감귤을 주섬주섬 챙기는 것이었다.

귤밭에서 일하고 받은 그 귤...
삼달리에서는 넘나 흔한 제주 감귤이지만
해발 1600미터에서 갈증을 달래준 귤은 정말 꿀맛이었다.

엉엉 울며 귤을 씹는데 그 달콤함이란...
"엉엉...맛있다...달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산 속에서 먼지만도 못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귤은 왜 이렇게 맛있는 것인가...사람은 참 이상하다.


등산에는 제주감귤! (사진 이힘찬, 그림 너굴양)


이번 산행으로
짝궁은 아이젠을 사신다 하고
서울에 가면 등산을 하신다 하니
화이팅...(도망)

아, 제주에 갔는데 급하게 한라산에 갈 계획이 생겼다면 '오쉐어'라는 서비스를 활용하면 좋다. 
짝궁이 아이젠이 없어서 살까 하다가 여기서 렌트했는데 패키지 구성이 다양해서 좋았다. 산행뿐만 아니라 제주에서 여행하면서 여행용품이 필요할 때 빌릴 수 있고, 무엇보다 숙소까지 배달이 되는게 아주 좋다.


겨울산행에 필요한 것들은 대략-

걸치는 것 : 윈드브레이커(바람막이), 다운점퍼, 발열내의, 등산바지, 겨울등산화, 등산양말(얇은 것과 두꺼운 것을 같이 신었다), 모자, 넥워머, 장갑(방수 되는 걸로), 손수건(은근 땀난다)

스패츠, 아이젠은 꼭 필요하다. 등산스틱도 다리 힘을 보조해줄 수 있어 좋다.
눈밭에 해가 내리쬐면 정말 눈이 부시니 고글 있으면 쓰시길. 여벌로 양말, 모자, 장갑은 꼭 챙겨야 한다.
나는 땀이 많이 나서 내려와서 갑자기 추웠다. 티셔츠까지 젖을 정도였는데 여벌옷을 안챙겨서 후회했다. 다 내려와서 떨지 않으려면 여벌옷을 챙기는 게 좋다.

들고가는 것 : 핫팩(붙이는 것, 주머니용), 물(보온병도 좋음), 초코바 등 간식, 젖은 옷 등을 담을 수 있는 파우치

아이폰은 영하에서 배터리 소모가 엄청나니 감안하시길... 중간에 몇 번이나 꺼졌다 ㅠㅠ
사진 찍을 분들은 방수주머니, 렌즈 닦을 수건 등 챙겨야 한다. 카메라는 사실 별 문제 없었다.
하지만 난 렌즈 후드를 잃어버렸을 뿐이고...ㅋㅋㅋ

사진으로 담지 못할 아름다운 설경을 잔뜩 보고 온 한라산,
다음에는 더 멋진 풍광을 허락해주길.

운동하고...갈게요...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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