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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살도 마음도 사랑도 마음껏 부대끼며 살고 싶은데, 나만 그런가봐요. 

어릴적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엄마, 왜 우리는 아파트에 살아?"

엄마는 "이렇게 살기 편한 곳이 어딨어. 관리 알아서 다 해주지, 깨끗하지, 놀이터도 운동장도 있잖아"



나는 성남시의 오래된 대단지 아파트에서 자랐다. 단지 바깥 굉장히 가까이 초등학교가 있었기에 아파트는 친구들 밭이었다. 옆 집에, 윗층에, 옆 동에 친구들이 있는게 신났고 학교를 마치면 약속이나 한 듯 동 사이의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거나 정글짐에서 위험천만한 곡예 게임을 했다. 아파트 안에선 술래잡기 게임을 했다. 복도식 구조였던 우리 아파트의 중간 엘리베이터와 끝자락의 비상계단을 이용해 1층부터 15층까지의 모든 공간을 이리저리 누비며 뛰어다녔다. 소리를 꽥꽥지르며 뛰어다녔어도 어른들은 '애들은 뛰어다니면서 크지'라며 꾸중을 주지 않았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식사 후 늦은 저녁이 되면 베란다 창 너머로 입을 벙긋대며 텔레파시 게임을 했다. 낭만의 밤이었다. 


가진 능력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못했던 우리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넓은 견문'을 가져야 한다며, 제 스스로의 유년 시절을 위로하는 듯 주말마다 태안, 남해, 경주, 부여, 강릉 등 국내의 오만 관광지 투어와 교육 프로그램으로 날 데리고 흘러 다녔다. 네모네모한 아파트 안에선 절대 볼 수 없는 바다가 갈라지는 광경이나 무수한 하늘의 별들, 그리고 수만 섬이 둥둥 뜨여진 광경은 인터넷이 지금처럼 일반화되지 않았던 그 때 마음과 머릿 속에 별난 울림이었다. 


나이가 들며 어느샌가 삶의 모양이 비슷해져간다고 생각했다. 슬슬 아이 부모가 되어가는 내 친구들의 삶의 모양을 보다보면, 평일 회사에서 이리저리 치여가며 겨우 집에서 쉬다 출근하다를 반복하고 주말엔 소위 <육아 전쟁>이라며 아이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들은 아파트 상가 혹은 근처 빌딩에 있는 밥집에서 외식을 하고, 커뮤니티 센터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은 놀이터 아니면 근처의 쇼핑센터에서 물욕을 자극하는 신상 장난감에 꽂히거나 스마트폰으로 키즈 영상을 본다거나. 


2년 전부터 지리산 여행을 연 1-2회씩 다니고 있다. 아파트에 사는 이유가 결국 <살기 편해서>라는 이유라면, 지리산 아래의 사람들은 담장도 없이 거친 산세 아래 자연재해만 겨우내 막아낼듯한 최소한의 장치로 살아간다. 앞마당엔 고추를 말리거나 감을 주렁주렁 처마끝에 달아 말리고 있고, 옆집 할매와 함께 수다를 떨며 오늘 수확한 밭의 작물을 다듬는다. 의와 식, 그리고 주가 조화롭게 담긴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곧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자각이 든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의 해답도 아스라이 보인다. 함께 시대를 지내는 이들과 살과 마음을 부대끼고 잘 만든 음식을 나누며 춥거나 땀흘리지 않을 정도의 계절에 맞는 옷을 입고, 자연 아래 햇볕을 받으며 행복하게 주어진 수명을 충실하게 지내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의 필독 도서는 유현준 교수의 <어디서 살 것인가> 였다. 저자가 지닌 건축적 지식을 생활과 태세에 현실감있게 해석하며 현 주거 생활의 담론에 비판논조가 강한 글이었다. 담장 높은 아파트와 점점 낮고 얇아져가는 층고와 두께, 예의 복도식 아파트와 2세대 위주의 요즘 아파트, 도시 속 자취가 뜸한 공원들과 공용공간들. 누군가는 살아가는 행복이 사랑하는 혹은 살아가는 이들과의 '연대'라고 했는데 일회용 연결고리만 잔뜩인 세상에 영원한 가치는 점점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 씁쓸하다. 




유년 시절, 엄마의 스파르타 외지 교육과 아파트 속 친구들과의 액션 게임들은 어쩌면 지금 삶의 태도를 만든 건강한 자양분인지도 모른다. 뛰어놀며 부대끼며 사는 즐거움과, 아등바등대야 자연의 섭리 아래 살고 있다는 겸허한 태도. 내 삶과 친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실마리는 모두 어린 시절의 시간에 존재했다. 

한창 부동산에 관심이 뜨거운 나의 밀레니얼 친구들이 '어떤 집 살고 싶어?'라는 질문을 할 때, 좁은 마당이 있는 아주 작은 주택 1층집에서 아이와 강아지 한마리가 뛰어노는 광경을 꿈꾸며, 옆집 엄마들과 함께 김장을 하며 살고 싶다 대답하는 내가 마치 부잣집 금수저 에어리언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싯가 3천도 안 될 듯한 작은 시골집에 사는 아주머니들도 다 그런 환경에서 사는데, 왜 이런 환경이 평창동이나 성북동의 엄청난 부잣집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같은 생활이 됐는지 이해가 어렵다. 사람들은 아파트를 욕망하며 아파트 외의 삶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는 것만 같았다. 


(*) 지금 살고있는 집의 계약이 곧 만료되 <0방> 앱들을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주택은 씨가 마르고 독방처럼 리모델링한 신축 빌라만 잔뜩이다. 게다가 뭘 관리하길래 관리비가 이렇게 비싸???

좁은 공간에 유행하는 아파트 인테리어만 잔뜩 넣어놓은 영혼리스한 집은 싫은데, 선택의 폭이 좁아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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