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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순 영 Oct 27. 2024

푸른 장막의 숲

아지랑이가 잦아들고 윤이의 눈앞에 푸른 장막의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정표 역할을 하던 초록달은 숲 어딘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초록달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에 둥지를 틀어 잠시 휴식을 취하곤 한다. 그는 생각의 무게가 찰랑일 무렵에 숲 어딘가에 둥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쉰어 간다. 초록달은 다른 달보다 관찰력이 좋아서 생각이 빠르게 차오르는 편이라 휴식 주기도 짧다. 무게를 비우는 방법은 달마다 다르지만 초록달은 둥지에서 눈을 감고 생각을 충분히 멀리 날려보낸다. 달무리가 일렁이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초록달이 천천히 다시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초록달은 둥지를 떠나며 이따금 관찰에 사용한 생각 조각을 떨어뜨리곤 한다. 이 투명한 생각 조각을 통해 세상의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어떤 이들은 이 생각 조각을 모으기 위해 초록 달이 둥지를 만들었던 자리를 찾아 헤맨다.




윤이가 장막 사이를 지나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 외마디 외침이 들려왔다.
“아아아악!”
누군가 크게 화가 난 듯한 소리였다. 놀란 윤이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투명의 연보라빛 장막이 흔들리더니 멀리서 얼핏 반짝이는 눈빛이 보였다. 그 위로는 하얗고 커다란 뿔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자라 있었다. 그제서야 정체가 짐작이 갔다. 실루엣이 천천히 가까워지더니 다시 외마디 소리를 외쳤다.

“놀랐잖아!” 

노루가 원망스러운 눈빛을 하며 윤이와 도 앞에 나타났다.

“나도 놀랐어. 네가 그런 소리를 낼 줄은 몰랐거든. 목청이 좋네?” 

윤이가 말했다.

“그렇지, 이 외침은 여러모로 유용해. 지금도 봐봐. 넌 일단 놀랐잖아. 그래, 어쩐 일이야?" 

노루가 만족스러운 듯 대답하며 되물었다.

“우리는 붉은 숲으로 가는 중이야. 왜가리 선생님을 만나러.”

이를 들은 노루는 윤이를 향해 반사적으로 말을 툭 던졌다. 

“괜찮아?”

“응? 뭐가?”

“왜가리 선생님은 보통 그럴 때 찾잖아, 왜…”

윤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옆에서 도가 윤이를 바라보며 외쳤다. 

“배고파.”

“그럼 잠시 쉬면서 이거라도 먹자. 노루 너도 같이 먹을래?”

윤이는 가방에서 주먹밥을 꺼냈고 노루는 숲 아래에 떨어진 장막을 털어 바닥에 깔았다. 세 사람은 장막 위에 앉아 주먹밥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도는 주머니에서 다기를 꺼내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좋네.”

윤이가 말했다. 

노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아까 내가 한 말에 신경 썼다면 미안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 내가 이런 부분에서 좀 서툴러.”

윤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조금 당황하긴 했어. 말해줘서 괜찮아졌어. 고마워.”

도가 노루를 바라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좋다. 철새들은 네가 없는 존재인 줄 알아.”

윤이는 도와 노루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달산책 길에서 도를 모르는 이는 없어. 음. 나는 겁이 많아. 내 그림자나 내 소리 때문에 놀라는 이도 있을 테지만 사실 나도 지나가는 존재들이 무서워. 거리를 유지하려면 좋은 목청을 써먹을 수밖에.”

도는 웃으며 말했다. 

“숲의 장막 속에서 거닐면 위험할 일이 없지.”

노루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지.”

윤이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세 사람은 찻잔을 들고 둥지로 내려온 달이 잠에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가봐야겠어. 만나서 반가웠어. 나는 노바리 포구에 살아. 마음이 내키면 들러줘.”

 노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이제 차귀포구로 가는 거야?”

“응. 곧 관망하는 달을 지나야 해. 고마웠어. 다음에 봐.”

노루를 향해 대답하는 도를 향해 윤이가 물었다.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도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윤이는 그 뒤를 따르며 노루가 있던 방향으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노루는 이미 사라지고 장막만 흔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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