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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에 단풍이 내려오면(치악산 종주길에서)

- 나는 아직도 나의 사랑을 기다릴 테요

by 갈대의 철학
치악산 치마바우 종주 전망대에서

치악에 단풍이 내려오면(치악산 종주길에서)

- 나는 아직도 나의 사랑을 기다릴 테요


시. 갈대의 철학[겸가蒹葭]



첫 마음 첫 정에 이끌러

첫 차에 마음을 실었다

굽이굽이 치악령 넘어서는 마음은

일찍이 치악의 성황림에 유혼을 빼앗긴 채


타들어가는 빈 마음은

오장육부에 칼을 도려내어지고

빨래 찌어짜듯

이 가을바람에 널려있는 마음이 있어

떠나가도 좋아라


참을 수 없는 욕심의 그늘 아래 서면

나는 금세 너와 지냈던 담즙을 쌓게 하고

떠나가라 떠나가라

차마 입에서 올라오지 못해

어눌져 막혀버린 오랜 하수구에 쌓여간

이물질들에

대항할 수 없는 악마들


뱃속에 차곡히 절인 배추처럼

네 모습 대하는 나의 처절한 몸짓을

불어오는 이 가을바람에

강제로 들춰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세월 따라 깊이 파인

네 언저리 깊게 숨겨놓은 가슴골에

얼룩이 져 가고

나의 깊이 파인 이마에는

너와 나의 지난날의 지난 마음이

다가올 겨울 찬바람을 예고하듯

사형대에 끌러가듯이 체념하고 평온해져 온다


떠나는 자의 마음은

늘 호숫가에 불어오는

잔잔한 마음의 동요가

나를 깨우고 언제나 부산스럽게 만들고


아직은 이르다. 시작도 안됐다

버스에 내린 마음이

치악 종주의 하산의 마음이다


산행 시작하기도 전에

하산 때의 마음인 듯싶어

파도치듯 울령졌던 고뇌도

세상은 하나 되듯 고요한

이 숲을 깨우고 흔들며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성남길 접어들고

들녘의 마음은 여름 소년의 마음을 지녔다

이 가을을 시작하기 싫어하는 벼 이삭은

농부의 손 끝에서

언제나 파리 목숨처럼 위태로워진다


빨간 마음에

네 마음을 담으려 떠나왔고

치악에 단풍이 내려오면

나는 아직도 나의 사랑을 기다릴 테요


치악에 가을이 내려왔다

상원사에서 떠내려온 단풍 하나의 마음

아직은 네 모습을 건져 볼 내 마음은

떨어지는 계곡 물소리에

네 마음을 감추고


간간히 아침 햇살 너머로 비친

농익어 가는 네 모습 바라볼 때면

발그스레 너를 처음 대하던

부끄럽고 수줍던

시집올 때 연정의 모습이 되어간다


아직 상원의 마음은

때 이른 겨울의 마음을 담고

깊고 사려 깊은 네 마음은

치악 상원의 마음을 닮아간다


보여줄 듯 말듯이 하는

손 건네주면

금세 닿을 듯이 다가서 보이지만


이 가을을 떠나보기엔

아직도 나의 마음은 여리고

이 가을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 곁에 다가서는 마음은

이미 지난가을에

네 마음은 피보다 더 붉었다


그래도 네 마음을 요동치고 싶어

떠나는 자에게 보여줄

네 미향이라도 남길쏘냐 싶어


나는 이 가을 자락에 숨어 지내는

네 모습을

이 강산이 핏빛처럼 물들여가게 만들 테다


치악산 상원사
치악산 상원사
치악평전

2019.10.12 치악산 하프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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