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라
- 떠나가거라
시. 갈대의 철학[겸가蒹葭]
사랑이 남아있을 때 떠나가라
모든 것을 주고 나니
더 이상 나에게 남는 것은
허우대뿐인 빈 허울만이
넘실 넘실 덩실덩실
바람에 이리저리 춤추며
끝내는 사랑했던 날 보다
사랑하지 못한 날들이 더 많아
이별의 아픔에
상처만이 남게 되더라
행복이 남아 있을 때 떠나가라
슬픔이 물 믿듯이 쏟아지면
지난 행복은
일장춘몽이 되어가네
자꾸 눈물이 앞을 가려
추억의 회상에 젖어들 때면
미워했던 날 보다
사랑하지 못했던 날이 더 많아
눈물샘이 마를 날이 없더라
미련이 남아 있을 때 떠나가라
오래된 잔정도
묵은지 마냥 쉰내가 날 테고
묵은 된장처럼 맛은 있으돼
그 고약한 냄새는 참아야 할 터
때가 지나면 알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더 잘해 주지 못했을까?
그동안에 남아있던
잔정들의 밥풀떼기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한결같은 마음들
세월 지나 떨어지는 것은
비단,
자연의 순리만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나마 잔정이 붙어있을 때
떠난다는 말은
당시에 내게는
달콤한 언어의
유희적 도단이었더라
인연이 남아있을 때 떠나가라
인연의 끝을 보고 떠난 뒤에는
새로운 인연도 나타 난나지만
그만큼 세월의 노력 없이는
약팔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연은 한낱
저 하늘에 떠가는
덧없는 구름 한 조각에
미덥게 털어버린
먼지 한 종지와 같더라
2025.6.21 용소막 성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