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01 강의실 (밤)
문학 교재 펼쳐진 책상에 앉아있는 파랑과 나
가사 정철 [관동별곡] 읽고 있다.
훈민정음으로 쓰여 읽기 힘들어하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더듬더듬 읽고 있는 파랑.
화면, [치악에 드리다라 섬강이 어드메오] 뵌다
글자 밑에 그어진 밑줄, 포커싱 되는 파란 글자
파랑의 손가락이 짚고 있는 글씨, [연군지정]
갸웃하며 고개 드는 파랑
파랑 쌤, 소양강물이 왜 연군지정이에요?
나 응??
파랑 소양강 물이 어디로 흘러가든가 말든가
솔직히 알 바 없잖아요?
나 연군지정이 뭐였지요?
파랑 (기억나지 않아 난감) 어엄.....
나 (퀴즈 내는 톤) 자 퀴즈!
파랑 (화들짝 놀라다 순식간에 집중하는) 퀴즈..
손에 든 펜을 일자로 세우고 최면 걸듯
반사적으로 순식간에 집중하는 파랑
나 양반 남자는 뭐만 얘기한다고?!
파랑 (기억나지 않아 난감) 어엄......
나 (재촉)<고전문학 작자공식> 빨리!
파랑 (반사적 대답) 왕, 유교, 휴가, 은퇴, 유배!
나 (같은 톤, 목소리 높다) 그치!
그럼 나올 상황은?!
정신없이 눈알을 돌리며 빠르게 생각하는
'고,전,문,학,작,자,공,식' 발음하는 파랑
파랑 음... (더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 (목소리 더 높아지는) 빨리! 빨랑, 빨랑!
정신이 없어 더 아무 생각 안 나는 파랑
그런 파랑을 보며 귀여워 픽 웃는 나.
원래의 말투로 설명하기 시작하는
나 조선시대 남자는 어떤 사람 이랬죠?
말이 없고 생각이 깊고 한 마디씩 딱, 던지는
그런 사람 이랬잖아요?
그래서 말로 할 표현은 정해져 있다고.
파랑 (아는 거 나오니 신난) 네!
성리학 얘기! 임금님 사랑해요!
자연이 너무 좋으다!!!!!!
나, 파랑 보다 구글지도 화면을 실행하는.
인터넷 창을 켜고 한반도 지도를 보여준다.
기점을 담양 창평, 서울 경복궁을 경유표시하는
보드에 판서한다.
<관동별곡>에서의 루트를 따라 길을 그린다.
원주까지 다다르는.
나 관동지역 관찰사로 임명을 받았어요.
관찰사가 지금으로 따지면 뭐랬죠?(보는)
파랑 (보는) 공무원!
나 (빙긋) 그렇죠, 여긴 고급 공무원. 도지사.
지금 강원도지사로 발령받아 가고 있어요.
한양서 출발해서 쭉쭉쭉... 철원, 원주...
가면서 어필하는 거죠. 계속.
파랑 뭘 어필해요?
나 (연기톤) 전하! 소신,
언제 어디서나 전하를 생각하옵니다!
파랑 대체 왜요?
나 왜? 왜긴 왜야,
잊히지 않아야 하니까 그렇죠.
이 시대 회사원들도 사장님께 그러잖아요?
똑같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아
고용주는 한 명, 구직자는 차고 넘치니까
파랑 아하?!
전하, 저는 언제 어디서 나 당신을 생각한답니다. 전하~~~~
생각을 해봐, 소양강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할까요? 개뿔, 궁금하겠냐?! 전혀! 관심 없지! 그냥 흘러가나 보지. 대체 강물이 어디 가든 알 바냐고?!
거기다 우리나라는 동서지역 단면 보면 뭐야. 산맥 때문에 동고서저지형이잖아? 강물은 거의 서쪽으로 흐른다고. 알잖아? 배워서? 근데 그게 한양 방향이다, 그럼 무조건 갖다 붙이는 거지. 저는 가는 이 잠깐에도 전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왕조시대라 아무리 법이 있어도 그 위에 임금이 있어요. 한번 미운털 박히면 당연히 못 뽑히는 거고, 있는 동안도 계속 충성한다는 걸 보여줘야지. 근데 왕도 사람이잖아요? 충성 표현하는 방식을 다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각자 좋아하는 아부 방식이 있겠지. 이때 왕이 선조였는데 이런 말을 좋아했어요. 정철은 거기에 맞게 플러팅을 한 거지.
이 정도는 되어야 좌의정을 합니다......
에잇, 더러운 세상......
지금 이 세상이라고 바뀌었을까? 즈언혀.
한탄하는 어조로 설명을 잇는 나
파랑, 그런 나를 보고 쉬지 않고 웃는다
파랑 크크크크크크크킄 아 쌤!
너무 현실적인 거 아니에요?
자라나는 청소년에 꿈과 희망을 주셔야죠!!
나 꿈과 희망을 줘서 뭐 하게요?!
더럽고 치사한 현실,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주는 게 낫지.
그래야 살면서 뒤통수 맞진 않을 거 아니야?
파랑 (머리 긁적이며) 그런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건 글을 쓰기 위해 생업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건 내 선택이다.
예전부터 아이는 좋아했다. 특히 구연동화로 아이의 시선을 사로잡거나 놀이하며 유아를 학습시키는 걸 잘했다.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식탁에 붙들어놓고 밥 먹이는 게 특기였다.
재주도 있는데 열 살 터울 남동생의 육아에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킬이 더 붙어 그래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유아교육과에 진학해 보는 게 어떻냐는 권유도 여러 번 받을 정도로 아이를 좋아했으나 선생이 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스승이란 한 사람에게 한 세상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던 터였다. 아이를 위해 몸을 갈아 바칠 수 있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자격이 있다고.
그런 나에게 선생님이란 자리는 대단했고, 또 무거웠다.
삼 남매의 맏이로 살면서 좋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동생들 잘 보고 있었어? 착하네.” 같은 칭찬도, 쓰다듬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또 "너는 언니가 되어서 그것도 못 해?"같은 야단맞은 기억들만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언니답지 못한, 동생보다 못한,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런 나라서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가 아니며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글을 쓰기 위한 직업 탐색 중, 사교육 강사로서 ‘문학’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인성교육은 필요 없는, 교사가 아닌 ‘강사’. 문학 전공이고 작가 지망생이니 문학을 어려워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구연하듯 재미있게 문학작품 설명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작은 그랬다.
나 (정색)아, 됐고.
사회생활 잘하고 대단한 직업 갖고
출세하고 그런 건 1도 바라지 않으니까
어른은 됩시다.
파랑 (의아) 어른이요?
나 응. 어른. 정확하게는 성인.
파랑 (이해 안 됨) 대학 가면 성인이잖아요?
나 나이만 먹으면 다 어른됩니까?
학교 못 간다고 교수님한테 엄마가
우리 애 못 간다, 전화하게 만드는
그런 대딩이는 되지 않아야겠죠?
파랑 에이, 그런 애가 어디 있어요?!
나 없을 거 같지? 마아아아않아요~~~~~~~
파랑 진짜 있어요?
나 네! 너무너무!
파랑 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파랑의 얼굴.
그런 애가 어딨겠냐면서 계속 궁시렁대는.
나 하던 걸 그만두려면 직접 말할 줄은 알고,
잘못했으면 분명히 사과할 수 있는 어른.
그 정도면 나는 됩니다.
그것만 해도 욕은 안 먹고 살걸.
파랑 아?
나 파랑이는 그런 청소년인가요?
파랑 (금세 심각) 음... 모르겠어요
나 (싱긋) 모른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어린이는 아닌 거네요.
파랑 우웅... 진짜 모르겠어요.
나 나도 꽤 자주 내가 어른인 것 같지 않아요.
같이 어른 됩시다!
[문학]이라는 교과서가 가르치려고 하는 건 감정이다.
감정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정도 배워야 한다. 어떤 감정이 있는지 알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느낄지 문학작품을 통해 간접경험들을 해 봐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으로 상상할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거시적으로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알고 있어야 하는 감정을 배운다.
책을 안 읽는 시대, 문학교과서는 이전보다 더 막중한 임무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과서가 개정될 때마다 시대가 반영되어 있는 것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특수한 타이틀이 있는 몇몇의 작품이나(ex 허균<홍길동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특정한 히스토리가 얽혀있는 작품(ex 고려가요 ; 세종시대 채록되어 <악학궤범>, <악장가사>등에 실림)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렇다.
'전화 포비아'같은 사회현상이라던지, 해가 갈수록 젊은 사람들의 사회성이 점점 떨어진다는 기획기사 같은 것들을 보면서 '요즘 애들'인 학생들에게 어떤 걸 가르쳐야 사회공포증을 덜 가질까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함께 공부하며 보는 수많은 문학작품의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타자들의 감정을 체화시켜 주려 많이 노력했다. 상황과 맥락을 파악할 줄 알아야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이후 나는 문학작품으로 세상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렇게 햇수로만 13년.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감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 어느새 나도 아이들에게
몰랐던 감정들을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