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불안이라면 너는 최대한 겪지 말기를
S# 02 가르치고는 있지만 나도 학생이라서
강의실, 급하게 도착해서 어수선한.
숨 고르다 눈 마주치자 멋쩍게 웃는.
나 오늘 그림은 잘 그리고 왔어?
노랑 네. 오늘은 대회 준비하느라고
(주섬주섬 휴대폰 꺼내며) 이거를...
(카톡 사진 전송) 여기요
나 저번에 보여준 그림도 이뻤는데.
오, 이건 멋있다!
노랑 (으쓱) 쌤은요?
오늘 작품 합평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 (시무룩) 응 했지. 엄청 까였어.
노랑 (의아) 아니 왜요?
저번에 기획안 보여주신 거? 재밌었는데??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노랑의 표정
이를 본 나, 순식간에 표정 허물어진다.
나 (키힝) 소재 신선한 거에 비해
구성이 너무 떨어져서 (어쩌고 저쩌고)....
노랑 (얼굴 찌풀) 알져알져 우씨.
저도 원근감 너무 떨어진다고 혼났어요....
나 (같이 찌풀) 아니 왜! 잘만 그렸고만!
노랑 (표정 따라 하는) 아니 왜! 재미만 있었는데!
그런 노랑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
나 (눈치 보며) 진짜 재미있었어?
노랑 (눈 땡글, 진심이다) 그럼요!
나 (못 믿어 더 작은 소리... 힘없다) 정말?
노랑 (진심 분개하는) 쌤이 말해줘짜나요!
진짜로 얼마나 재밌었는데!
나 (따라 하는 노랑, 귀여운) 수업 합시다.
(웃음) 책 펴요.
완전히 취업을 했다가 글 쓰는 걸 포기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 이후 몇 년간 매주 한 번은 학생으로서 수업을 듣고 나머지 다른 일엔 강사로서 수업을 하러 가는 일정이 지속되었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공부가 어려운가.
드라마 작법 수업을 들으며 매 순간 생각했다.
수업을 듣고, 스터디를 하고 생업이 끝나면 한, 두 시간씩 작품을 쓰고 아침이 오기 직전에 잠드는 일상은 계속 됐지만, 글 실력이 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갔다.
합평 시간, 내 작품 제목이 불려졌을 때,
합평 대상자로서 맨 앞에 나가 마련된 자리에 앉았을 때, 쏟아지는 고칠점들을 들으며 심장에 화살이 쿡쿡쿡쿡 꽂혔다.
누군가가 “이건 너무 낯설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내 낯섦이 틀린 건가 백번은 의심했다. 작품에 대해 수업시간에 피드백을 들으면 선생님께는 혼만 나고, 읽어달라는 부탁을 해서 겨우 받는 지인들의 피드백은 두루뭉술한 칭찬뿐이었다. 공통된, 평균적 의견이 몇 개 되지 않았다.
나는 수업을 들으면서 나아지고 있는 걸까.
생각하면 우울해지기만 하니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끔씩 내가 나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너무 답답했다.
드라마 대본은 작품의 내용이 ‘일부분’ 일 수밖에 없는 ‘극’의 형식상, 극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거나 관련 업종을 꿈꾸는 사람들만 읽는다.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극’ 장르라면 거의 그렇다.
게다가 하필 내 지망은 ‘취향을 타는’ 장르였다.
사극을 보지 않는 시청자들이 있듯, 드라마작가 지망생 중에서도 사극 대본은 읽지 않는 이도 꽤 되었다. (으레 성인클래스가 그렇듯이 각자 일들이 있고 바쁘기 때문에 수업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합평수업이지만 작품을 못 읽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합평은 보통 손을 드는 희망자에게 순서가 간다. 거기에 사극은 대사에 쓰인 고어와 시대상을 고려하고 고증 까지도 살펴야 하기 때문에 합평하기가 더 까다롭다) 진입장벽이 높아서 굳이 ‘안’ 읽어오는 사람도 많다.
드라마도 내신등급이나 모의고사 등급처럼 소수점까지 점수가 매겨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뭐는 고칠 거고, 뭐는 버릴 거고, 뭐는 살려둘 건지 가늠이라도 해볼 텐데.
어느 쪽에서 이게 별로인 것 같다고 해서 이 쪽을 고치면 다른 쪽에서는 이 쪽은 너의 개성이 드러나는데, 왜 고쳤냐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작품에 대해 수업시간에 피드백을 들으면 선생님께는 혼만 나고, 읽어달라는 부탁을 해서 겨우 받는 지인들의 피드백은 두루뭉술한 칭찬밖에 없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나아지고 있는 걸까,
나?
너무 답답했다.
생각하면 우울해지기만 하니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끔씩은 그랬다.
내가 나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등수같은 건 꿈도 못 꿀 오리걸음이지만,
나아가고 있는지.
나는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학사 이후로 학위가 남는 것도 아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대학원을 갈 걸 그랬지.
이 시간을, 이 학비를 들일거면.
그래서 나는 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어.
내게 투자하는 학비가 너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지.
나는 그나마 시간 촉박하게 생각하지라도 않는데
너는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라고
너무나도 많이 주변에서 듣잖니.
그래서, 나는,
네가 나처럼은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느 새
그게 내 바람이 되었다.
선생님을 부르는 학생이자 동시에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강사.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지금도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나에게 느끼지 않게 하겠다는 게
어느새 큰 목표가 되었다.
쉬운 선생님이 되겠다고.
나를 선생으로 부르고 있는 학생들에게
그 애들이 만나는 그 어떤 선생님 보다
쉬운 선생님이 되겠다고.
나처럼 묻지 못해 고뇌하지 않고,
모르면 망설이지 않고 얼마든지 물을 수 있는 쌤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해 못 하면 될 때까지 끝까지 설명해 주고, 외우지 않고 직접 쓰게 만들어 주게 하겠다고. 뭐가 이해가 되지 않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해도 척척 알아서 짚어주고 싶다고.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을 너희들은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쌤, 이건 왜 이렇게 되는 거예요?”라고 혹시 물으면,
나는 수업을 멈추고 칠판을 다시 채운다.
사실 나는
공부머리도, 요령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아둔한 머리로 무엇이 중요한지, 덜 중요한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모든 것에 힘을 쏟고 열심히 밖에 할 줄 모른다. 내가 그런 학생이어서 오히려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을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짐했다.
일 년에 네 번,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 점수가 올랐는지 안 올랐는지만, 모의고사 때여야 등급이 올랐는지 안 올랐는지 만으로 자기 자신을 판별하며 좌절하는 내 학생들에게
매일매일 나아지고 있음을 알려주겠다고.
사진출처 프리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