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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로그림 노운 Jan 02. 2024

뒤에서도 묵묵하게

숨어 있는 조력자


공을 줍는다. 수업 20분을 마치면, 널브러져 있는 공을 주워야 한다. 처음에는 뭣도 모른 채 그냥 하나하나 주웠지만 조금씩 요령이 생긴다. 바구니를 이용하기도 하고, 채를 이용하기도 한다. 테니스 예능, <내일은 위닝샷>에서 한보람이 몇 개월 안 된 테니스 막내로 나온다. 이 아이의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볼걸. 굴러다니는 공을 주워 담는 역할이었다. 누군가는 주워야 한다. 수업을 받은 자, 공 뒷정리는 본인의 몫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다. 주는 공만 칠 수는 없고 하고 싶은 경기만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공을 줍다 보면 공을 조금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복싱을 배우러 가서 매일 줄넘기와 청소만 수개월을 하면서 인생을 깨치게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반복하는 작은 일에서도 뭔가를 배운다. 공을 줍고 그날의 레슨을 복기하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하기 싫은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공 하나에 포핸드, 공 하나에 백핸드, 공하나에 서브 자세, 공 하나에 발리, 공 하나에 랠리, 그렇게 별, 아니 공을 헤다 보면 윤동주도 생각나고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정신 차려!)



고교시절, 난 연극부였다.

주인공이 아니라도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이 전부인 줄 알던 시절도 있었는데. 주연을 맡기 못해 속상했던 1학년 때를 떠올려 본다. 조연을 맡았지만 그 떨리던 순간, 원하던 주연을 했다 해도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던. 16년 세월을 주인공으로 살았는데 조연을 하게 되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도 같다. 중학교 시절 환경 미화를 할 때, 반 아이들의 도움이 절실했고 잘 도와주어 좋은 결과를 내 준 아이들에게 고마웠다. 또한 합창 대회를 통해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기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중심에서 진두지휘하던 사람은 바로 나였는데. 그런 내가 조력자의 역할을 실제로 맡게 된 것이었다. 처음으로 뒤에서 조력하는 사람들을 직접 겪으며 잘 조력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체득한 시간. 2학년이 되어 조명과 음향 등을 맡으면서, 그 중요성을 새삼 더 느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모두 합쳐져야 비로소 주인공도 빛이 난다. 어딜 가든 뒤에서 소중한 역할들을 말없이 수행해 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지 않아도 중요하고 감사한 사람들. 빛나는 주인공 뒤의 더 빛나는 조력자들.



이 모든 건 누군가의 덕분이다


내가 쓰레기 없는 말끔한 거리를 거닐 수 있는 것도, 다 ‘누군가’의 덕분이다. 누군가는 제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없이 새벽에 나와 길거리의 낙엽들을 쓸고 쓰레기를 치우고 간밤에 내린 눈을 치운다. 우리는 아침이 되어서야 그 흔적을 알고 감사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다. 병원에 와서 깨끗한 진료 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미리 쓸고 닦고 쌓여 있던 쓰레기들을 깨끗이 치워놓은 덕분이다. 병원에서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숨은 공로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내가 본 환자의 예약을 도와주고, 누군가는 환자가 해야 할 검사에 대해 안내해 주고, 누군가는 접수를 해 주고, 누군가는 어느 과의 진료가 필요한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사장이 병원을 세워 주었기 때문이고, 병원에 신경과를 개설해 준 덕분이며,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총무과와 행정팀이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며, 줄줄이 나열해 뭐 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사실만이 진실이다.


공을 주우며 오늘도 생각한다. 공 하나에 어머니, 공 하나에 아버지, 공 하나에 남편, 공 하나에 첫째 딸, 공 하나에 둘째 딸, 공 하나에 언니, 공 하나에 오빠, 감사한 사람들, 그리고 연말연시 행복했으면 하는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사람들. 오늘도 건강하게 뛰고 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다양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렇게 오늘도 공을 줍는다. 숨어 있는 공까지, 끼어 있던 공까지 찾아 쇽쇽 줍기로 한다. 지금 이 글을 읽어주는 그대를 포함하여, 숨어 있던 고마운 사람들까지 하나 둘 떠올리며 오늘도 레슨을 감사히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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