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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 Sep 07. 2021

25년 전, 그녀로부터 온 쪽지

비우기 위해 비우지 않은 것들. 그 첫 번째




 오랫동안 큰 박스 안에 넣어두고 보관만 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바로 편지이다. 어릴 적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직장 생활하며 직원들에게 받은 롤링페이퍼, 의미 있는 청첩장, 성적표까지... 일단 나는 의미 있는 기록들, 내 삶에 나와 인연을 맺으며 주고받았던 흔적들을 이 상자에 넣어두었었다. 이젠 너무 많고,, 그냥 다 버릴까 했지만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린 채 그대로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펴보며 버릴 건 버리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클리어 파일 한 권으로 정리할 예정이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난 것. 한 20대 후반, 그러니까 10년 전쯤 그때도 정리한다고 펼쳤다가 발견했던 쪽지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재미있고, 좋았는데 아이 엄마가 되어 10년 후 다시 꺼내 본 '그녀'의 쪽지들. 10여 년 만에 꺼내진 그 흔적들은 바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 짤막한 이야기들을 보며 다시 내 어린 시절로 잠시 돌아가 본다. 그리고 어느덧 나는 훌쩍 자라 당시의 그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엄마가 되었다.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보곤 했던 그녀의 쪽지


 쪽지들은 한 40여 장 정도 되었다.

이 쪽지들은 약 25년 전 다시 일을 하게 된 그녀가 매일 점심때 들러 우리에게 남기고 간 애씀의 흔적이다.


 기억을 거슬러 보니, 그때가 아마 내가 초등학교 5~6학년 즈음이고, 남동생은 나보다 세 살이 어렸으니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던 거 같다. 반나절 동안 두 남매만 있기에는 남동생이 좀 어리긴 했지만, 그땐 크게 그걸 또 위험하다고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거 같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아파트가 많지 않았고, 동네 골목길에서 동네 아줌마 할머니들이 평상에 앉아 내 아이 너 아이 경계 없이 골목서 놀던 아이들을 봐주던 시기였다. 그냥 그게 자연스러웠던 거 같다. 봐준다는 개념도 불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후 내가 살던 동네도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흩어졌고, 서서히 골목, 마을의 정서가 사라졌다.



 펼쳐보니 이 정도 된다. 꽤 많다. 아마 더 많았을 텐데 일부일 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이걸 모아두어야겠다 하고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이고 내 게으름에 감사하다.



 어제는 이 쪽지들의 '발신자'와 함께 읽어보았다. 그녀는 하나하나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며 신기해했다.

 그 당시 그녀는 집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점심때 집에 들렀다 다시 일을 나섰다고 했다. 점심을 챙겨 먹고는 우리가 먹을 간식들을 챙겨놓고, 또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챙겨놓고는 다시 일을 나갔다가 저녁때 돌아오곤 했단다.

 그때는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작은 공장에서 아이 안부 차 매번 전화를 거는 것도 녹록지 않았을 터. 그 대신 그녀가 생각해 낸 게 바로 편지 쓰기. 작은 상에다가 간식과 함께 작은 손바닥만 한 쪽지를 놓고 가는 것. 그렇게 집에 아이들을 두고 돈을 벌러 나가는 것에 대한 걱정과 불안, 미안함을 조금은 상쇄시키고 싶었을 거다.



그 염려와 당부로 나와 남동생은 학교가 끝나면 신발주머니와 가방을 던져놓고 가장 먼저 그녀의 쪽지부터 확인하곤 했다. 그때는 일종의 놀이 같은 거로 생각했던 거 같다. 오늘도 상에 쪽지가 있을까? 간식도 있을까? 하고.

 

 하나하나 읽어본다. 정말 별거는 없다. 아주 소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 아침에 잘 갔다 오라고 얼굴 보고 보냈으니 항상 첫 문장은 "잘 다녀왔냐"부터가 먼저다. 그리고 엄마의 잔소리. 손부터 씻고 간식 먹어라부터,  양치질 좀 하라는 건 주로 동생 차지였다. 나한테는 간식 먹을 때 물 먼저 먹고 먹으라는 이야기, 가스불 조심하라는 이야기, 동생 00 좀 챙겨줘라. 학원비 잘 갖다 내라는 이야기....



이렇게 바빴던 날은 간단히, 대신 하드 사 먹을 정도의 돈은 두고 가는 센스.


그때의 물가가 가늠이 가는 대목.




이 쪽지에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있다. 매일매일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메모를 남겼던 이유.





그때의 그녀에게는 어떤 목표가 있었을까. 분명 그녀에게도 엄마로서의 역할이 아닌 '나'로써 서고 싶은 바람이 있었겠지.





이제는 내가 그녀의 나이가 되어




 지금의 그녀와 나는,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리 찐한 모녀관계는 아닌 것 같다. 그녀는 나와 많이 다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닮았다. 근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는 내가 본인과 닮은 구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부지런하고, 자주적이며, 손도 빠르고,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다. 그녀는 내성적이고, 감성적이지만, 관계중심보다는 문제 중심적이며, 예민하다. 근데 어느 날 보니 나도 좀 그런 거 같다. 그래서 그녀가 항상 내게 너는 너만 생각한다고 하나보다.


 어제는 이 편지들을 보면서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된 내가 이제야 그때의 그녀를 진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거 같다. 아이 둘을 잘 키워내는 것과 사회에서 내 일을 찾고, 또 내가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싶었던 그 간절한 마음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저울질하며 포기해야 했을지.



동생이 나에게 남긴 메모. 이거 보고 빵터짐.




어제 쪽지들을 읽어가며 깨달은 사실 하나.


그녀가 일을 했던 것도 기억하고, 이런 쪽지를 우리에게 남기고 갔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반나절 동안이나 그녀가 우리에게 부재중이었다는 기억은 떠올려진 적이 없었다는 거.



그건 아마도, 엄마가 바삐 써 내려갔던 그 쪽지가 우리에겐 그녀의 부재를 잊게 할 만큼 컸나 보다.





25년이 흐른 지금도 그 쪽지들에는 그녀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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