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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 Oct 04. 2021

반려 텀블러를 키우고 있습니다.

텀블러 중독자가 외출하는 법

Tumbler

; 굽, 손잡이가 없는 컵, 굽이나 손잡이가 없고 바닥이 납작한 큰 잔




외출하기 전 나의 고민은 이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양 어깨와 두 손이 자유로운 미니 크로스이냐, 아니면 언제든 든든한 만물상 에코백이냐. 스타일과 기능이 엄연하게 다른 백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텀블러를 가지고 갈 것이냐 말 것이냐로 나뉜다. 그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외출 전에 나의 이동 동선과 외출의 목적을 떠올린다. 





나의 외출 목적



- 아이 등 하원, 공부방 셔틀

- 도서관, 책모임 등 만남

- 장보기

- 가족 산책, 나들이




대략 이렇게 좁혀진다. 막상 이렇게 적어 본 건 처음인데 전업주부의 삶은 참 단조롭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챙길 짐은 많아진다. 외출의 목적에 따라 나의 준비물들은 부엌한켠에 놓인다. 그리고 나의 반려 물건들도 곁에 둔다.




기본값 : 핸드폰, 지갑

+

손소독제, 손수건, 장바구니 + 책 + 텀블러 + (빨대)

손소독제, 손수건, 장바구니 + 다회용 비닐 또는 찬통+ 텀블러?!

손소독제, 손수건, 장바구니 + 책 + 텀블러 2개+ 간식 도시락+ 빨대+스푼 n포크+돗자리


참 피곤하게 사는 것 같아도 이렇게 상황별 짐 싸기를 오거나이징 해두면 의외로 편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꼭 다급해져야만 외출을 하게 되는 40대 아줌마의 못 된 습성을 조금은 우아하게 바꿔줄 수 있는 미봉책임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다만 이렇게 적어두진 않고 여러번 훈련?끝에 생긴 노하우랄까.


크기별 장바구니들. 그 중 오거스트그린 장바구니는 내 반려물건이 되었다.

이런 피곤한 습관이 자리한 데에는 지난 6년간 최전선의 육아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육아 이등병의 갈고닦은 특훈 덕분이었다. 약 돌까지는 모유수유를 했었기 때문에 분유 수유를 하는 엄마들보다는 비교적 단출했지만, 그래도 나 이외의 다른 생명체와의 평화로운 동행을 위해서는 여러 개의 총알과 구급책들을 준비해야만 전장에 뛰어들 수 있다는 걸, 그래서 '기저귀가방'이라는 이름을 단 촌스러운 전투가방이 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그렇게 쓰임을 다하면 왜 그렇게 흔적없이 장롱에 쳐박히게 되는 지도 그제서야 알았다.





나 역시 처음부터 외출을 위한 반려 물건들을 키운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사람 구실을 하게 되면서 서서히 나의 양손과 어깨에 자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매불망, 대체 기저귀와 젖병과 간식 통을 놓고 나갈 날이 올까 싶는데, 그런 날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기띠와 용품에 자리를 뺏겼던 예쁜 가죽 가방과 미니백들을 어깨에 걸쳐보는 날이 잦아졌다. 한껏 어깨를 펴고, 한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는...

그런데 그래도 아직 아이와 나갈 때는 어쩔 수 없이 아이용품들로 어깨를 채워나가야 했다. 뭐라도 챙겨나가야 마음이 편한 엄마로 산 지 6년 차, '엄마'도 그렇게 조금씩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나 보다. 그리고 언젠가부턴가 밖에서 일회용 테이크아웃 컵과 일회용 빨대와 물티슈를 쓰고 버리는 게 아깝고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싱크대 정리를 하는데 어디에서 받아 온 텀블러들이 4~5개나 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커피 애호가도 아니고 레포츠를 즐기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필요하다고 텀블러를 이렇게 쟁여뒀을까. 그때만 해도 텀블러는 멀리 여행 갈 때 산에 갈 때 가끔 꺼내 쓰는 이벤트성 물건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무겁고 잘 써지지 않은 텀블러들과 새 플라스틱 텀블러들은 나눔 하고, 관리하기 편하고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은 스텐텀블러를 고르고 골라 사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반려 텀블러 키우기는 시작되었다.



손잡이가 달린 작은 스텐텀블러가 나의 최애 텀블러다. 그리고 그렇게 텀블러 중독자가 되면서 텀블러도 용도에 따라 TPO에 맞게 가지고 나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 아이와 짧은 외출, 가볍게 나가고 싶을 때는 플라스틱 텀블러

-혼자 카페에 가거나 모임 나갈 때는 스텐 텀블러나 머그 텀블러

- 가족 나들이 갈 땐 500미리 텀블러와 플라스틱 텀블러 두 개




나에게 '반려'물건이라는 개념과 존재를 알 수 있게 해 준 텀블러들 덕분에 다른 물건들도 소중히 오래 곁에 두고 보며 쓸 수 있는 것들로 키워나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러려면 나의 취향과 성향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필수이다. 그래야 그 물건과 나 사이에 빈틈이 없이 꽉 맞을 수 있게 된다. 친구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물건도 그런 정성이 깃든 선택을 받은 아이는 꼭 보답을 하게 마련이다. 




매일같이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이 생산되고 버려진다.

선택하는 자로써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수많은 손길과 과정을 거쳐 탄생한 물건들 중 하나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비록 지금은 반려 텀블러밖에 없지만, 반려한다는 수식어를 붙인 특별한 물건들이 내 삶 곳곳에 함께 하길 바라게 되었다. 남에게는 낡고 손 때 묻어 값어치가 없어 보일 지라도 나에게만 그리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가끔은 좀 버겁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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