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독서 모임을 하면서 양육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에게도 발언 기회가 와서 나의 양육관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양육을 해온 지 오 년 남짓 되었지만, 양육관에 관해서 생각해 본 적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해 왔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번 계기를 통해 생각해 본 나의 양육관은 환자 대하듯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 정신과 환자,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환자를 꼽아보라면 아마도 경계성 인격장애환자(보더라인)를 들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는 이에 대해 이견이 없을 것이다. 수련 중에 보더라인 환자에게 데어본 정신과 의사도 수없이 많을 테고. 그만큼 힘들다.
이 환자들의 주 증상은 자해 및 자살 시도다. 이들은 자살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 특히 정신과의사들 앞에서는 더더욱. 거기다 더해 자해한 상처를 보여주면서 동정심을 이끌어내고 자해 실현 가능성을 부각한다. 이에 대해 경험 없는 수련의가 과도한 개입을 하게 되는 경우 부적절한 애착 관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 사람은 나를 걱정해 주고 내가 자해한다고 하면 다 해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환자는 조금씩 선을 넘기 시작한다. 치료시간이 길어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적인 만남 요구까지 그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병적인 애착관계가 생기기 딱 좋다. 그러다가 의사가 요구를 거절하면? 의사를 비난하고 치료관계 자체가 끝나버린다. 치료행위라고 한 것이 결국 환자에게 독이 되어버리는 경우다.
양육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보더라인 환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나약함은 부모에게 마치 의사가 환자를 바라보는 수준의 차이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하여 부모는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를 정신과에선 컨트롤 이슈(control issue)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컨트롤 욕구가 과해지면 결과는 보더라인에게서 치료 실패와 비슷한 패턴이 된다. 부모는 아이에게 언제까지고 다 컨트롤해줄 수가 없다. 부모가 제공해야 할 것은 안전한 가정 분위기와 건강 정도라고 생각한다. 마치 의사가 보더라인 환자에게 나는 병원에 있을 것이니 필요하면 나를 찾아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의사는 환자에게 개인 전화번호를 제공하면 안 된다. 부모는 아이에게 결정권을 앗아가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전에 자해 환자에게 "저는 환자분의 기분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환자분의 행동까지 어찌할 수 없지요. 저는 그저 여기 진료실에 있을 것이니 도움이 필요하면 저를 만나러 오시길 바랍니다. 저의 진료가 환자분에게 힘이 되길 바랍니다"
라고 말하듯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이야. 아빠는 늘 여기 있을 것이다. 네 결정대로 하되 혹시라도 힘들고 지치면 아빠에게 오렴. 아빠가 너의 그늘이 되어줄게"
P.S 이것은 양육관에 대한 이야기고 실제 양육과 환자 보기는 다른 점이 더 많다. 환자는 힘들어해도 안아줄 수 없지만 아기는 언제건 안아줄 수 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