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허씨가 그런 기분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은 진료실이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자리에서였다. 허씨는 정신과 진료와 명상을 병행하면서, 방 안에서만 틀어 박혀있던 생활을 차차 청산하고 가족과의 식사자리를 같이 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 안의 생활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에는 정년퇴임하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가 함께했었다. 그리고 허씨가 그렇게 아버지와 식사를 함께 하던 어느 날, 아버지는 허씨에게 말했다.
“OO야. 요즘 OO랑 식사를 같이 하는 게 늘은 것 같아. 맨날 방에만 박혀 있더니 좋아 보이는구나.”
“네. 아빠.”
오늘은 웬일로 무뚝뚝한 아빠가 말을 거나 싶은 허씨였다. 그렇기에 허씨도 다소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허씨가 별 반응이 없자 아빠가 다시 얘기했다.
“이렇게 OO랑 같이 밥을 먹고 있으니 OO 어렸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어릴 때 형이랑 같이 밥을 먹고 있으면 서로 아빠한테 얼마나 안기던지. 밥을 못 먹을 정도였지.”
그렇다. 허씨에게는 형이 있었다. 형은 벌써 애초에 독립해서 애까지 하나 낳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터였다. 허씨는 아빠에게 물었다.
“제가 그랬다고요?”
“그래. 그때 내가 너무 형만 이뻐하고 우리 OO이는 많이 못 이뻐해 준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아빠가 저런 말도 할 수 있구나 하고 허씨는 생각했다. 나이가 드시니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런가?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 뭉클한 기분이 드는 허씨였다. 아버지는 말을 이어갔다.
"형은 OO이 나오기 전에 외동이나 다름없어서 아빠가 많이 예뻐해 줬었는데, OO이는 태어날 때부터 둘째라 혼자만 예뻐해 줄 시간이 없었지. 그래서 평소에도 많이 형을 질투했었던 것 같아. 그럴 때 OO이를 좀 더 이뻐해줬어야 하는데 아빠도 둘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 늘 형이 먼저였던 것 같다. “
허씨는 말없이 밥 먹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허씨는 늘 형에게 뭔가 자격지심을 느끼곤 했다. 어렸을 때는 질투를, 커서는 자격지심을. 생각해 보니 아빠는 늘 허씨가 아닌 형을 예뻐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커서는 아빠가 세상으로 변했다. 세상은 늘 나만 빼고 예뻐한다. 남들은 잘 되도 나는 잘 되기 어렵다...
“그래도 이렇게 OO랑 같이 집에서 밥을 먹으니 좋구나. 형은 이제 집 나가서 1년에 몇 번 얼굴 보기도 힘들잖니. 우리 OO이도 집 나가기 전에 아빠가 좀 더 잘해줄게.”
“네.”
허씨는 고개를 떨구고 밥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가슴에 있는 말. 원망, 분노인가? 아니면 고마움? 그런 감정들이 밥을 먹다 말고 허씨 가슴 안을 맴돌았다. 허씨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명상 때 연습해서 그런지 느낄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에 이름을 붙여주려고 노력했다. 아빠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구나.
그러다가 허씨는 깨달았다. 허씨는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형이 아닌 허씨가. 그리고 그것은 여러 모습으로 응축되었다. 돈을 많이 벌면 아빠가 인정해 줄까?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하면 아빠가 인정해 줄까?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건 어떨까? 한강뷰가 보이는 끝내주는 집을 사는 건? 그건 다른 사람들이, 그리고 아빠가 원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정작 허씨가 원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버림받기 싫은 허씨의 마음속에서 허씨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허씨는 밥을 그만 먹고 들어왔다.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그리고 허씨가 느끼는 감정들을 일기에 적기 시작했다. 일기가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런 허상에 얽메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허씨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