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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ul 06. 2018

24. 우리는 함께 버틸 타인들

타인의 다름이 화해의 가능성이 될 때

*느빌의 책방에서는 "멘붕"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타인"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피프티피플>은 "타인" 3부작 중 세 번째 텍스트입니다.





# 51명의 사람들의 느슨하게 단단한 연결


정세랑의 소설 <피프티피플>은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다. 소설에는 총 51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이들의 관계나 이야기는 깊게 연결되기도 하며, 아주 얕게 연결되기도 한다. 아무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인 셈인데, 새삼스럽게 이들의 삶의 짧은 순간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이어지는 신기한 이야기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로부터 그때 실려 왔던 환자의 어머니로, 그때 지나친 다른 환자로, 또 그의 아내로, 그 아내의 친구로. 말 그대로 자신도 연결되어 있는 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데도 이들의 순간들은 서로 낯설거나 이질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들에게서는 어떤 모습이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것이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일상의 슬픔, 그리고 그 슬픔에 대처하는 방식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소설 속 인물의 공통점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생활을 힘겹게 버티고 있으며, 버티면서도 제정신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p.190)들 말이다.


작가가 포착한 이들의 일상에는 마지막까지 지켜지는 태도 같은 것이 존재했다. 각각의 인물들은 지난하고 개별적인 슬픔의 순간들을 맞이한다. 그러나 결국 어느 지점에 가서는 자발적으로 지킨 자신과 주변에 대한 태도, 이를 테면 예의 같은 것이 두드러지며 마무리된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론 점점 짧은 타인들의 이야기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예컨대 나는 모든 타인은 어느 지점에서는, 혹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착하고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는 걸까? 정말 그렇게 낙관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점점 이 이야기들이 판타지스럽게 읽힌 것이다.



#이만큼이나 다르고 비슷한 타자들


그래서 내가 감각하는 타인들의 모습을 떠올렸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출퇴근길의 꽉 찬 대중교통 속 장면이었다. 평일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언제나 힘들지만, 금요일 퇴근길에는 유독 더 그렇다. 다들 도망치듯 뛰쳐나와 어딘가의 약속으로 향하고 그 무리엔 당연히 나도 속한다. 금요일 퇴근 이후 역삼에서 합정까지의 긴 여정을 떠나는 날이면 나는 자의식을 최소화시키고 최대한 둔감해지려 노력한다. 가끔 질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모든 움직임이 제한되고, 가뜩이나 작은 내 몸은 파묻히고 또 파묻히는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럴 때면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앞사람의 땀냄새. 이건 분명 나에게도 날 것이고, 나와 몸이 밀착된 이 사람도 나처럼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싫겠지. 싶은 생각들을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타자의 참을 수 없음을 내게서도 발견하면서 견딘다. 그러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무표정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나 또한 다시 나의 생활로,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타자와 어느 순간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못난 것들을 공유하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금세 공유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며 살아가는 그런 장면들. 


친절해. 사람들은 친절해.

그게 거짓말인 줄은 알고 있다. 고장 난 트렁크를 친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집에 가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얼굴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 <피프티피플> 중 


나는 <피프티 피플>을 읽으며 이런 퇴근길의 장면이 떠올랐는데, 그건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을 먼 타인들의 이야기를 건네 듣는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 속 누군가는 나와 닮지 않았음에도 그에게 이상하리만큼 공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감정은 굉장히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현실과도 닮았다. 나는 현실세계 속에서 타자들과 마주하며 내겐 없다고 믿는 비겁함을 발견해 미워하기도 하고, 나와 닮았다고 믿는 선한 모습을 찾아내 사랑하기도 했다. 


우리도 그렇게 변하면 어쩌지? 엉뚱한 대상에게 화내는 사람으로?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지쳐서 변하면 어쩌지?

― <피프티피플> 중 


신기했던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적어도 한 줄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바랬듯이 말이다. 아마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이 책을 읽고 나눌 수 있을 작은 기쁨 중 하나일 것 같다. 어느 타인에게 이해를 더 내어줄 수 있었는지가 어쩌면 내가 더 이해받고 싶은 나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까.  



#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우리는 생활 속에서 수많은 타인과 깊고 얕은 관계들을 알게 모르게 맺고 있고, 내가 하는 사소한 언행이 타자의 삶에 우연히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될 수도 있다. 어둠 속 건너편 창문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손을 흔드는 행동이 누군가에겐 그 도시 전체의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베푸는 친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같은 것이 모이면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예컨대 마지막 장에서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모두가 안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이야기들은 어쩌면 무사할 수 있었고, 무사했어야 할 몇몇 사고들을 떠올리게 하며 그래서 아프기도 하다. 


살아 있는 게 간발의 차이였다. 그 '간발 차'의 감각이 윤나를 괴롭혔다. 자칫했으면 이 팔들이, 살아 있는 팔들이 썩고 있을 뻔했다. 죽음은 너무 가깝다. 언제나 너무 가깝다. 전철에서 지나치게 몸을 밀착하는 기분 나쁜 남자처럼 가깝다. 무시하며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윤나는 늘 등 뒤를 돌아보고야 마는 편이었다. 전철 전체가 암전 되듯이 마음 전체가 까매지고 마는데도.

― <피프티피플> 중 


작가는 그러니까 현실에서 실패한 안전의 가능성을 ‘사람들’에서 찾았다. 흐르는 모래를 보면서 타인을 낭떨어지로 밀어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흐르는 모래를 보고 타인을 구해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타인의 무해한 다름이 모였을 때 사회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50여 명의 긴 여정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와 타인의 다름이, 어떻게 화해의 가능성이 되는지를 말이다.


필요해.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필요해. 나팔수가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사람이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것. 그걸 하기 위해 선택한 거잖아. 윤나는 일어났다. 막 구급차에 실리는 규익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는 달라. 너는 필요해."

― <피프티피플> 중 


<피프티 피플>을 읽은 후 문학의 효용을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문학의 효용은 견딜 수 없는 타자를 한번 더 나에게로 끌고 와서 이해해보려는 의지를 응원해주는 것에 있다. 내 곁에 혹은 저 멀리의 타인의 다름이나 같음이 언젠가는 굉장히 혐오스럽지만, 다르고 같아서 늘 망하고야 마는 것이 아니라 화해할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달라서 필요하고 같아서도 필요한 수많은 이들을 어쨌건 ‘사람’으로 보도록 돕는 그런 것. 그래서 타자들은 내버려두고 나만 잘하면 세상이 상식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장의 낙관이 나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내 에너지가 닿는 문제들에 답하고 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런 것은 나 또한 타인의 선함을 보며 판타지스러운 것은 아닐까 하고 뒤로 물러났던 것처럼, 어쩌면 누군가에겐 닿지 않을 이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믿음, 바뀔 수 있고 변할 수 있다는 끈질긴 믿음이야 말로 일상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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