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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Mar 09. 2019

늙어가는 일에 대하여

45. 김혜진, 『딸에 대하여』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3월의 주제는 [노년]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익숙하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체감하게 되니까. 예전에는 아프지 않았던 스트레칭 동작이 이제는 아플 때. 금방 나았던 감기가 이제는 오래 갈 때. 피부가 예전 같지 않을 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일러주는 자잘한 에피소드야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에피소드를 겪는 와중에도 늙은 노인의 얼굴이 선뜻 떠오르지는 않는다. 늙은 노인의 얼굴은 낯설다. 죽지 않는다면 나도 언젠가는 되고야 말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머나먼 순간 같은 것. 그래서 늙은 내 얼굴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많지 않다. 기껏해야 주름이 많겠지, 외롭겠지, 무섭겠지, 심심하겠지, 고집이 아주 세겠지, 가난하겠지. 이런 것들뿐이다. 여기엔 내 편견이 있을 것이다. 노년에는 삶도 마음도 시간도 아주 삭막할 것이라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마다 듣게 되는 노인의 궁시렁 앞에서 나는,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싫다, 저런 건. 이런 거리감으로 ‘노년’을 잠깐 생각하다 접는다.

        

그런데 이번 주제가 ‘노년’이 되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늙는다’는 것을 곱씹어야 한다. 이미 겪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겠는 그것을. ‘노년’을 곱씹을 처음으로 어떤 책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딸에 대하여


책 제목이 <딸에 대하여>다. ‘딸’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에는 물론 딸에 대한 말들이 있다. 그 딸의 어미인 ‘나’의 목소리를 하고서, ‘성 소수자·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딸에 대한 말이 책 안에 아주 많다. 거기서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딸을 바라보는 ‘나’의 얼굴이었다.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어떻게든 대들고 보는 성정. 그리고 ‘나’에겐 불미스러운 것일 따름인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태도’는 ‘나’의 삶에 없다시피 한 것이다. ‘나’의 삶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딸의 것들. 그것을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 출처를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혹은 알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처연히 응시하거나 외면하는 ‘나’의 얼굴이 유독 눈에 띄었다. ‘나’는 아주 늙어버린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충분히 늙어버린 사람이라서 ‘노년’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선명하다. ‘나’는 아주 늙어버린 젠을 자꾸 들여다본다. 젠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은 젊은 딸을 생각한다. 딸의 인생을 망치는 ‘그 애’를 생각한다. 그 사이에 있는 ‘나’의 얼굴과 말, 그리고 선택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나’는 요양원에서 ‘젠’을 돌본다. <딸에 대하여> 이야기는 ‘나’의 집에 딸과 ‘그 애’가 함께 찾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딸에 대하여>는 딸과 그 애, 젠 사이에서 ‘나’의 마음이 어디로 어떻게 향하는지 담담하게 내보인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간다는 것이다. 그 마음은 ‘젠’을 바라보며 더욱 확실해진다. 몸과 마음이 자꾸만 엇나가기는 순간이 곧 들이닥친 것만 같은 ‘나’다. 누군가가 돌봐주지 않고서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늙음을 ‘나’는 명백히 안다. 그런 ‘나’에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그래서 소중하다. ‘나의 반과 반려자의 반을 빼닮은 아이가 있는 단란한 가정’은 마땅한 것이고 평범한 것이며 보통의 것이다. 그 바깥의 삶을 상상해본 적 없는 ‘나’는 자신의 딸이 가족이라는 당연한 울타리 밖으로 멀어질까 두렵다. 이 아이는 늙어간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인데. 그저 모른 체하는 걸까. 어쩜 시간을 이다지도 낭비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에 왜 저다지도 열심일까. ‘나’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방패로 딸을 외면한다. 


늙는다는 것

     


딸에 대해여, 그 무엇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외면하기 일쑤였던 ‘나’였다. 그랬던 그녀가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젠의 존재이다. 젠의 삶은 ‘나’가 딸의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동시에 물음표도 된다. ‘나’에게 마음과 돈을 쏟는 일이란 가족에게만 타당한 것인데, 어째서 결혼도 않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이들에게 돈을 쥐어주다가 이런 말미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그렇게 질문하는 사이, 그녀는 ‘세상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은 없다’는 진실을 어렴풋이 예감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바깥에도 ‘서로가 상관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젠의 삶에서 부당함을 느끼던 ‘나’는 이미 예감했지만 모른 체 해온 그 진실을 제대로 직시하기에 이른다. 부당함은 매번 번져나간다는 것을. 누군가의 부당함은 곧 또 다른 누군가의 부당함이 되고, 그 누군가가 나 자신이거나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한두 사람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가 앞으로도 우두커니 버티고 서있는 것임을. 그 진실을 직시하게 된 그녀는 평생토록 해본 적 없는 일을 감행한다. 처음으로 모난 듯이 굴어도 보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며 젠을 집에 데려온다.       



불편한 것들을 제대로 직시하는 일. 그것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일상은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당연하다고만 생각해온 것들에 구멍을 내는 순간부터 ‘평온하고 안온한’것들이 멀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런 일상은 누구에게나 편할 수 없다. 하지만 쉽사리 쓰러지지는 않는다. ‘나’처럼. 일상의 전투를 지탱해주는 관계라는 것이 새삼 많다는 것을 오히려 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가족만큼 가족 같은 존재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면 숱한 ‘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나’는 변한다. 느리더라도 지그시. ‘나’의 세계가 변했다 한들, 그래서 이 세상에 얼마만큼 변화가 있을까. 여전히 편견은 견고하다. 그래도 ‘나’와 ‘그 애’, 그리고 딸이라는 이 세 꼭짓점의 모양은 조금 변했다. 어디로든 분명하게.   


   



‘나’의 변화


많은 변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이 소설의 결말은 불충분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 그다음을 상상해본다. 모르는 존재, 알고 싶지도 않은 존재, 그렇기에 그녀의 세상에선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던 딸과 ‘그 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니까 ‘나’의 세계는 처음 ‘나’의 반복은 아닐 것이다. 어디론가 쓴 마음은 매번 돌아온다. 바깥으로 쏟아낸 마음은 어느새 나라는 사람을 지탱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아주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허투루 마음을 쓰는 일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니까.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으로의 삶을 어떤 기억과 어떤 관계로 채워 넣어야 할까.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는 삶을 살아야지. 부당하다 생각되는 일을 모른 체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그러다 보면 나 혼자서 생각하는 노년,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가난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덜 외롭고 덜 심심하고 덜 무서운 노년을 보내지 않을까. 그런 자그마한 기대를 하게 되었다.       



외롭겠지만 덜 외로웁게




이기적 이타심


이타심은 타인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타인이 오직 타인으로만 그치는 거라면, 이타심이란 건 우리 안에 자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타인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이해하고자 애쓰는 마음마저 들기 어려운 존재니까. 생각해보면,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일에는 어쩔 수 없이 ‘나’와 ‘내 주변’이라는 개념이 끼어든다. 타인이 더 이상 ‘타인’으로만 머물지 않을 때, 그 타인의 모습이 나와 내 주변으로까지 확장될 때, 비로소 ‘무언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인다. ‘나’라는 개념이 끼어들어야만 마음이 인다는 것은 참 이기적이다. 그런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은 없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그 타인을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한다. 마음을 써버린 상대니까, 더 이상 타인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기적일 수 있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존재와 관계의 확장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여튼, <딸에 대하여>를 읽는 내내 나는 그게 참 이상했다. 자기 안에 우글대는 불편함·부당함·억울함 때문에 시작된 일이 타인에게까지 가닿아 그렇게 관계가 얽히고설켜 견고해질 수 있다는 것이. ‘나’와 젠, 딸과 그애의 묘한 관계처럼.    



포옹하면 나도 따뜻


  

부정은 못해도 반문하는 일


<딸에 대하여>를 읽는 내내 깜짝 놀라고 또 위안이 되었다. 늙은 사람의 세계가 내 생각만치 삭막하지는 않다는 것. 그 세계도 점점 커져나갈 수 있다는 것. 내 미래가 조금은 고집불통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 역시 사람이 사는 세계니까. 고집불통일 늙은 나도 무언가를 보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보면서 조금씩 변하고 조금씩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을지도. 책을 읽고 나는 어떤 노년을 보내고 있을까, 하는 기대를 아주 조금 하게 되었다. (여전히 노년은 무섭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얼굴이 아주 오래토록 남았다. 제대로 보겠다는 결심에 수반되는 용기에 대해 생각했고, 그것이 지금까지의 삶을 통째로 반문하는 일일 수 있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선택하는 늙은이의 얼굴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부정은 못하더라도, 반문은 해보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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