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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Mar 28. 2019

과거를 마주한 당신

48. 피트 닥터 「업(Up)」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3월의 주제는 [노년]입니다.


* 3월의 주제 [노년] 업로드 일정표

- 3월 09일(토) 책 『딸에 대하여』(2017), 김혜진

- 3월 13일(수) 영화 「네브레스카」(2013), 알렉산더 페인 

- 3월 23일(토) 책 『아버지와 아들』(1862), 이반 투르게네프

- 3월 27일(수) 영화 「업(Up)」(2009), 피트 닥터


* 영화 「업(Up)」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작별을 고할 수 있나요?
평생 함께하던 아내를 떠나보내고 쓸쓸히 집으로 들어가는 칼


과거에 얽매이는 나의 모습을 마주할 때가 많다. 대학 시절, 한두 학기 동안 해외 유학을 다녀오고 나서, 매 학기가 지나면 새롭게 다녀온 유학생들의 수기를 찾아 읽었다. 1-2년이 지나고 나서야 관음증과 같은 유학 수기 읽기를 멈추고 그 시절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실험실 생활을 그리는『랩 걸(Lab Girl)』이란 책을 사 읽기 시작했다. 짧게나마 실험실에 다녔던 적이 있는데, 역시 아련한 심정 때문에 책을 집은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많은 문을 열었고 선택지를 밝으며 성장해온 사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운신의 폭이 더 좁아진 느낌이다. 어느 모임 때 한 친구가 "(지금의 어린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어렸으면 유튜브도 고민 없이 시작했을 텐데-"라고 말했다. 나 또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해도 부당한 일을 겪었거나 상처 받았던 경험이 있어서, 혹시 모를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움츠러들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마음을 다해 참여 중인 이 브런치의 서평 콘텐츠 공간에 다른 사람처럼 사진이 들어간 서명을 넣는 게 두렵다. 두 번째로, 그 순간에 어떠한 선택을 하지 않아 마주해야 할 현실이 더 단단해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유학이 만족스러웠다면 아예 학교를 옮기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현실적인 사정을 고려하느라 그러지 못했고, 이제는 더욱 현실적으로 변한 나를 마주하고 있다.


영화 「업(Up)」의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Carl Fredriksen)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부터 탐험가를 꿈꿔왔지만 현실의 풍파 속에서 추억 어린 헬멧과 고글이 집안에 남았을 뿐이다. 소꿉친구 시절부터 역시 탐험을 꿈꿨던 아내와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자며 저금통을 채운지만, 저금통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깨지고 만다. 아내와 사별하고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공간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다. 재개발 지구에서 덩그러니 홀로 남은 집을 지키다 공사장 인부와 갈등을 빚고, 그의 얼굴을 지팡이로 치는 바람에 퇴거당할 위기에 처한다.


당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나요?


여기까지, 칼의 소망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며 자본의 논리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다. 양로원으로 쫓겨나지 않더라도 재개발로 당신의 집 외에 모든 공간이 변한 동네는 더 이상 이전의 그곳이 아닐 것이다. <느빌의 책장> 매거진에서 이번 달에 다룬 『딸에 대하여』(도서)에서 양로원의 현실을 알 수 있었는데, 몸을 가눌 수 없는 노인들을 상대로 기저귀를 아껴 그들이 욕창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집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퇴거 당해 양로원으로 쫓겨나 생을 마감할 칼의 미래가 엿보이는 듯했다.


여기서 애니메이션과 상상력의 아름다움은 탄식을 자아낸다. 헬륨 풍선을 팔았던 칼이 수많은 풍선을 매달아 집을 그대로 지키며 더 이상 그에게 다정한 곳이 아닌 동네를 떠나 갈망하던 곳을 찾아간다. (풍선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지만 넘어가자. 헬륨 가격도 오르기 전이었나 보다) 열기구가 된 집을 타고, 이제는 아내와 그가 동경해마지 않았던 탐험가 '찰스 문츠'가 발을 들였던 공간, 남아메리카의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고집스러워진 이유가 있나요?


우연히 여정을 함께 하게 된 꼬마 러셀은 종종 칼을 이해할 수 없다. 칼은 러셀이 이해하도록 설명하지도 않는다. 칼에게선 고집스러운 노인의 옆모습이 보인다. 선택권도, 변해버린 시대 속에서 살아남을 여지도 얼마 남지 않은 칼의 머릿속엔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고자 하는 아내와의 마지막 약속과 집념뿐이다. 야생 탐사대(?)원 러셀은 몸이 쑤신다며, 책에서 봤을 때와 다르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은 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폭포를 향해 묵묵히 걷는다. (어린 시절부터 칼이 꿈꿨던 탐험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과거를 마주하나요?


칼은 과거에 동경했던 탐험 영웅 '찰스 문츠'가 찾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환상의 도요새(?) 케빈을 눈앞에서 마주하지만, 헬륨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폭포로 가자고) 러셀을 재촉하기만 한다. 케빈은 칼이 맞닥뜨린 과거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유년 시절의 영웅 찰스 문츠를 만나지만, "어릴 적 영웅이 이제 나를 죽이려 하다니"란 아이러니한 말을 남기게 된다. 그가 평생 추억했던 헬맷과 고글은 수십 년 간 환상의 새는 찾지 못하고 자존심은 버릴 수 없어 악만 남은 문츠가 죽인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다. 노인이 된 문츠에게도 새 찾기는 젊은 시절의 목표이자 살아 움직이는 과거이다. 칼에게는 과거 속에 잠들었던 문츠가 악인이 되어 나타나 아내와의 추억,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전부와 같은 집을 불태우려 한다. 칼은 새로이 사귄 새('New'가 아니라 'Bird') 친구 케빈은 내팽개치고 불부터 끈다. 이렇듯 칼을 마주하는 과거는 살아 움직이지만 속이 쓰리다.


문츠는 케빈을 생포해 탐험 영웅으로서 과거의 영예를 되찾고 과거를 원복하려 한다. 하지만 칼은 씁쓸한 과거를 마주한 채 자신의 전부와 같던 집의 가구와 온갖 집기를 내다 버린다. 이윽고 진짜 탐험(원래 탐험은 미사일도 좀 피하고 말하는 개랑도 좀 놀고 전리품으로 비행선 하나쯤 얻는 거 아닌가요?)도, 자신의 과거의 전부와 같던 아내의 부탁("이젠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요")도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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