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휴학 종료 후 아싸가 될까 두려웠던 나. 노심초사 하며 교내 토론동아리에 가입했다.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열심히 활동한 덕에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을 수 있었고 모두가 행복한 동아리를 만들기 위해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장으로서 나의 첫 행보는 동아리의 대대적인 개편이었다. 운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우리 동아리는 문제 투성이었다.
첫번째 문제는
동아리 일에 체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부원으로 활동하던 2022년 당시, 우리 동아리에는 총 세명의 임원진이 있었다. 회장, 부회장, 총무로 직함이 구분되기는 했지만 각자가 무슨 역할을 하고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지에 대한 명문화된 메뉴얼이 없었다. 회장은 동아리 대표하는 사람이고, 총무는 돈관리하는 사람이라 쳐도 부회장은 뭐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부회장이 일을 안 했다는 건 아니다. 참 성실한 친구였다.) 가장 놀랐던 점은 22년에 임원진을 맡았던 친구들 세 명 중 본인의 의지로 임원진이 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먼저 나서서 지원했다기 보다는 얼레벌레 동아리 생활을 하다보니 어느새 임원진이 되어있었다고 했다. 나처럼 직접 쟁취한 자리가 아닌 떠맡겨진 자리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인수인계를 받은 사람이 없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 조금씩 나눠하는 방식으로 동아리를 운영해온 듯 했다.
동아리 규모가 크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런 방식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규모를 키우고 싶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아리에서 즐거운 경험을 했었으면 했다. 늘어나는 사람의 수만큼 할 일도 많아질텐데,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못 한 일처리 방식은 한계가 명확해보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임원진 사이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회장이 할 일, 부회장이 할 일, 총무가 할 일을 명확히 나누어 글로 정리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이렇게까지 빡빡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지적도 받았다. 내 입장은 단호했다.
명문화되지 않은 원칙은 양심과 융통성이 정의하기 마련. 칼 같이 구분해두지 않으면 결국 서로의 인간성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결론날 뿐이다. 사람도 적고 일도 적을 때야 좋은게 좋은거라며 넘어갈 수 있다. 누가 바쁘면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기도 하고, 누가 나서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면 여유 있는 사람이 눈치껏 나서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방식은 단언컨대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된다. 서운한 사람이 무조건 나올 수 밖에 없다. 나는 우리 동아리원들의 인간성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이기적으로 보이는 운영방식이 역설적으로 가장 이타적인 셈이었다.
두번째 문제는
토론동아리에 토론이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우리 동아리에서 진행되던 정규활동은 한 주에 한 번이 전부였다. 사실 횟수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점은 내용이었다. 정해진 주제로 동아리원들끼리 모여 40분간 이야기를 나누고 이야기가 끝나면 다같이 밥을 먹으러 가는게 전부였다. 소박하면서도 진지했다. 분위기는 참 좋았다. 다만, 토론을 진지하게 연습하기 적절한 환경은 아니었다. 이런 형식으로 운영되는 활동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토론동아리라면 엄밀한 절차와 형식을 갖춘 토론을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활동방식을 완전히 뒤바꿨다.
다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변화를 동아리원들이 받아들이기 버거울 수도 있다고 보았다. 기존의 활동방식을 유지하되 활동횟수를 주 1회에서 3회로 늘렸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같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식의 활동을 한 번, 찬성과 반대로 입장을 나누어 서로의 의견을 반박하는 활동을 한 번,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앞에 나와서 스피치를 하는 활동을 한 번. 이렇게 총 세번의 활동을 기획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활동의 난이도를 세분화했다. 토론경험이 얼마 없는 사람은 쉬운 활동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어려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활동이 다양해지고 많아지다 보니 부원들 입장에서 정신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나의 시야를 그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손수 동아리 활동 안내서를 만들어 배포했고 새로 들어오는 신입부원마다 구두로 안내했다.
세번째 문제는
동아리방 인테리어였다.
우리 동아리의 동아리방은 비교적 오래된 건물에 딸린 방이었다. 건물만 오래되었다 뿐이지 방의 구조나 면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인테리어였다. 군데군데 먼지가 앉은 바닥장판, 물때로 얼룩진 벽면, 어지럽게 널려있는 정체 모를(?) 기물들까지. 쾌적함이나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부분은 동아리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더러운 부분은 쓸고닦고, 쓰지 않는 물건은 버려야 했다. 대청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 나서는게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마땅한 보수도 없는 봉사활동에 누가 손을 들리가 없었다. 동아리방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동아리원 5명 정도를 밥 사준다며 꼬셔서 청소를 같이했다. 필요 없는 물건은 버리고 남아있는 집기는 깨끗이 정리했다. 더러운 바닥과 벽은 싹 청소했고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는 장판은 싹 들어냈다. 예전보다는 확실히 깔끔해진 느낌이었다.
열심히 하는만큼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만반의 준비를 거쳐 드디어 맞이한 개강. 사람들은 호평일색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동아리 활동에 체계가 잡혔다며 앞으로 자주 나오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동아리방도 훨씬 깔끔해졌다며 대체 어떻게 이걸 다 치웠냐고 경악하는 사람도 있었다. 뿌듯했다. 나의, 그리고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서 벅차오르기도 했다. 사람들의 평가와 같은 정성지표 뿐만 아니라 정량지표도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가입했을 22년 당시 우리 동아리는 총 인원수 40명 남짓의 소형 동아리였다. 열정적인 홍보의 결과였을까, 사람들의 입소문 덕분이었을까, 두 자릿수던 인원수는 120명으로 뻥 뛰었다.
3월 초순에는 활동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동아리방에 다같이 들어가기에는 자리가 없어 추가로 스터디룸을 예약해야 할 지경이었다. 대학교에서 처음 해보는 동아리, 처음 맡아보는 회장. 모든 게 서툴고 정신없었지만 나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만 가면 모든 게 좋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