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랩, 힙합
가사를 써 본 적이 없으니,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머릿속에서는 최고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 밖으로 나온 생각은 행동이 따라가지 못한다. 최고의 결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결과라도 나오면 좋겠다. 아무리 많은 래퍼들이 써낸 가사를 봐도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따라 하는 카피캣이 되는 게 두렵다. 내 생각을 담고 싶다. 내가 쓴 가사에 내 감정을 담고 싶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비트도 없다. 라임을 만들어보겠다고 펜만 잡고 있다. 어떤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적어도 될까? 이런 게 나와도 될까?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정답을 찾고 있었다. 단순한 두려움 때문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를 괴롭히길 바라고 있었다.
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재밌는지, 멈출 수 없는 일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가사를 쓰는 건 지금도 어렵다.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멈추는 건 아니다. 쓰고 싶은 글을 쓴다. 아무 형식도 얽매이지 않고, 제약도 없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 내려간다. 이 글에는 주제도 없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글을 만들어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글은 써 내려간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어떤 생각으로 이 글을 쓴 지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글 속에는 남아있다. 하나의 결과물이 되어 나를 보여준다. 가사라고 부를 수 없다 해도 상관없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글을 수천 개 가져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기억을 잃고 글은 나를 담는다. 정신은 맑아지고, 감정은 영원히 남는다. 글 속에서.
가끔씩은 글이 너무 짧은 게 아닌가 걱정하기도 한다. 솔직히 지금도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은 크게 없다. 그런데 이미 적어온 게 있어서 미련이 남는다.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느낀다. 이 글은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내려가지 않는 스크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쥐어짜 내면서 스크롤의 길이를 늘인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제목을 한 번 보고, 밑에 남기는 소설 속 이야기를 훑어본다. 그때마다 드는 새로운 생각을 다시 써 내려간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생각이 하나의 글에 담긴다. 주제도 내용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 다음을 기약하며 하나의 챕터를 닫는다.
결국 다시 돌아온다. 남겨진 미련을 치워버리기 위해 자리에 앉고 새로운 미련이 생긴다. 제목을 '랩, 힙합'이라고 적었는데 정작 이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조금 늦었지만 랩과 힙합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다시 돌아왔던 것처럼, 랩도 힙합도 계속 돌아왔다. 처음에는 랩을 좋아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랩을 싫어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내가 처음 힙합을 좋아한 건 언제였을까?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튼'을 어떤 이유로 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영화는 내게 힙합을 알려주었다. 단순한 랩이 아닌 하나의 문화이자 표출 방법에 빠지게 해 주었다. 정의로운 걸 추구하지만 영웅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하고 싶어서 가사를 적는다. 이런 모습들이 내 눈에 멋있게 보였다. 그렇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지고 전설이 된 N.W.A의 팬이 되면서 힙합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에미넴과 켄드릭 라마 그리고 릴 웨인이 플레이 리스트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왔을까? 내 플레이 리스트에는 과거뿐만 아닌 현재를 대표하는 래퍼들이 채우고 있다. 릴 우지 버트, 카디 비, 미고스, 스웨이 리 너무나 많은 래퍼들이 있었다. 그들의 노래를 듣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그리고 다시 켄드릭 라마에게 돌아갔다. 재밌는 노래 속에서 켄드릭 라마의 노래는 다르게 들렸다. 하나의 속삭임처럼 감정이 느껴졌다. 켄드릭 라마는 언제나 내게 말하고 있었다. 울림이 있었고,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갔다. 켄드릭 라마 뒤편에 투팍과 비기가 있다. 전설로 불리는 자들. 그들은 단순한 래퍼가 아니다. 혁명가로써 세상과 맞서는 삶을 살았다. 어떤 감정에서였을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구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본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져서였을까? 나는 그들의 모든 감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울림을 주었다. 동경하는 사람에게 받은 울림은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랩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힙합이라는 문화를 사랑하게 됐다. 힙합에 깊게 들어갈수록 랩의 영역은 작아졌다. 여러 개의 매개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힙합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 평화, 화합 세 개의 단어로 모든 걸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직관적이다. 나를 사랑한다. 모두가 자신을 사랑해서 평화롭길 바란다.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화합하며 살아간다. 서로가 부족한 자신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소리로 남들을 채워준다. 그리고 남들의 소리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그래서 자신의 밖으로 표출한다. 내가 가진 것, 내가 느끼는 것, 나의 생각, 나의 바람 모든 걸 세상 밖에 꺼내놓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이 안에는 사랑, 평화, 화합이 있다. 우리는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까? 힙합이라는 단어에 녹여버렸다. 사랑과 평화를 외치고 화합을 바라면서.
사실 나는 랩을 하는 법을 몰랐다. 비트 위에서 어떻게 가사를 뱉고 라임을 맞추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법을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내 마음속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뛰어난 기술을 요구하는 게 아니지만 좋은 랩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노아와 샘이 짜인 가사를 비트 위에 배치하여 빠르기를 조절하고 높낮이를 바꾸며 랩을 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다.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면 이게 맞는 선택일 것이다. 노아와 샘은 래퍼가 될 자격이 있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거리에서 위험과 맞서는 일이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일이다. 이게 핑계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노아와 샘이 내게 왜 랩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나는 랩을 할 줄 몰라.’
모든 흑인이 투팍과 비기가 아니다. 길가에서 아무 흑인이나 붙잡고 프리스타일 랩을 해보라고 한다면 당신은 멋진 랩을 들을 기회보다 턱으로 꽂히는 펀치를 받아들일 기회가 더 많을 것이다. 당신의 기대가 담긴 눈빛을 보면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공기가 괜히 불쾌해지고, 어제 새로 산 조던을 밟힌 것 마냥 기분이 더럽다. 하지만 이 분노를 담아 당신에게 말로 풀어낸다면 기대에 찬 눈동자는 더 커지고 기대는 확신으로 바뀐다. 서로 다른 의견 속에서 만족을 찾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노아와 샘이 내게 마이크를 건넨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가? 아니면 남들과 다를 것 없는 기대와 함께 나온 행동인가? 아무튼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어떤 비트가 나오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내가 뱉는 말이 랩인지도 모르겠다. 이야깃거리 하나 없는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까? 무의식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제는 현실과 너무 닮았다. 옅은 숨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스튜디오에 울린다. 눈을 뜨면 노아와 샘이 내 앞에 앉아 있고, 아저씨는 비트를 느끼고 있다. 나는 비트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저씨를 보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을 살아가는 삶이 익숙해질 때.
눈을 뜨는 법을 배웠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눈을 감는다. 어둠 속을 살아가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어느 누가 내게 숨 쉬는 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나? 나를 낳아준 사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이라곤 어둠.
빛은 궁금하지 않다. 어둠만이 내 삶을 가득 채운다.
어떻게든 살아가라.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살아가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
받은 것도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삶 속에서 어둠은 모든 걸 가려준다.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반복되는 어둠이 반복되는 건지도 모른 채. 하루가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어둠뿐만이 내 삶을 가려준다.
너는 눈동자가 꽤 빛나는구나. 어둠 속에서 살아 눈동자 따위에서 빛을 찾는다.
이 시간이 언제 끝날까? 어둠은 말하지 않는다. 보여주지 않는다.
제발 내 앞에서 빛나지 마. 제발 내 앞에서 빛을 운운하지 마.
어둠을 벗어던지고 싶지 않아. 내게 어둠은 삶이야. 이제 내 어둠마저 뺏어가는 거야?
아니면 우리가 어둠을 만든 건가? 언제나 그랬듯이 먹을 걸 만들고 입을 걸 만들었던 것처럼.
너희 땅에 어둠을 내린 건 우리가 아닌 너야.
너희를 위한 어둠 속에서 빛을 찾겠다는 움직임을 그렇게 막아야겠어?
이제 어둠 속에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둬.
우린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을 살아가는 삶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 보일 것들이 무서워 눈을 뜨지 못한다.
빛은 궁금하지 않다. 나는 어둠이다. 나는 어둠이다.’
또다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노아와 샘은 다시 웃음으로 나를 반겨준다. 박자와 라임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 할 말만 하는 랩이지만 속은 후련하다. 내 감정을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기회가 지금이 아니면 또다시 찾아올까? 지금 내게 랩은 돈벌이도 재미도 아닌 진실로 이루어진 바다이다. 거짓이 섞여 들어가도 거짓조차 진실로 만들어 버리는 바다. 바닷속에 내 감정을 쏟아부었다. 진실된 감정은 더 짙어지고 거짓된 감정은 바다의 일부가 되었다. 이렇게 바다 위를 떠다니는 삶이 진정한 나의 삶이 될 수 있을까? 깊은 바다의 두려움 위에서 평화롭고 천천히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흘러가는 삶을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 랩은 나를 공감해 주지만 나는 아직 나를 돌아보지 못한다. 내 안의 어둠을 온전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나를 알아가는 것이 두렵다. 거리의 총성보다 내면의 울림이 더 크게 느껴지고 죽어가는 사람의 피보다 내 몸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피가 더 무섭다. 내 옆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아직 혼자가 편하다.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순수한 도움을 본 적이 없기에 도움을 받는 것이 두렵다.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도움이 다가와도 내 눈의 일부는 어둠이 물들어 있다. 나의 눈에 비친 모든 것에는 어둠이 있다. 내 눈에 있는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희미해지지도 않는다. 이 어둠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두려움 속에 살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두렵다. 과거를 돌아보기 두렵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두렵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 내 두 눈을 핑계로 두려움과 함께 살아간다. 과연 내가 두려움을 떨칠 수 있을까? 아니면 두려움을 꼭 떨쳐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 옆에 있는 노아와 샘은 답을 알고 있을까? 나는 노아와 샘의 두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