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계절에 대하여
내게 계절을 논하는 일은 세상에 몇 없는, 좋아하는 일이다. 계절이란 세상의 실없는 대화에 가장 자주 소환되며 이는 사람들 모두 계절을 만만히 여겨 좋아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국은 또렷한 계절이 많아 다행스럽다. 연중 뜨거운 나미비아의 사막에서 매일 계절 이야기를 하면 조금 실없는 사람이라 하겠지, 꽁꽁 언 알래스카는 또 어떻고.
반면에 계절은 불만이 많을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계절이 존재하는지 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 그러고 보니 알래스카와 아프리카에도 수많은 계절이 살겠구나. 고작 혈액형 따위로 인간을 나누지 말라 열을 냈던 게 순간 터분하고 미안해진다.
너라는 계절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렵다. 내 나름대로라면 여름이 다섯 스푼, 가을이 세 스푼, 난데없는 봄 한 스푼, 겨울도 반 스푼 그리고 모르는 무엇이 반 스푼인-너는 유치함에 실소를 터뜨릴 테지만-그저 이렇게 부르면 되는지 모르겠다. 가령 '오늘은 다섯 스푼의 여름, 세 스푼의 가을, 난데없는 봄 한 스푼, 겨울 그리고 모르는 것이 각각 반 스푼인 바람이 참 좋구나.'라는 인사를 건넨다면 무슨 대답을 들을까. 대답을 들을 수는 있을런가.
번잡하고 엉뚱해도 마음껏 계절을 헤아리는 일을 나는 좋아한다. 오늘은 주관적이고 계절 역시 그러하므로. 너의 여름과 나의 겨울은 아마 세상의 시간 같은 선상에 놓일 수도 있으리라. 말했듯 우리는 심심할 때마다 계절을 곱씹는다. 오가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쉬이 작별하곤 한다. 이 또한 계절의 입장에선 퍽 서운하리라 생각한다. 계절은 항상 오고 가고 결국 너는 또 올 것이기에 아쉬워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 한 번도 이름 불리우지 못한 ‘그 계절’의 심정을 나는 차마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도 핑계는 있다. 생에서 기약 없이 순환하는 계절. 아로새긴 수많은 이야기가, 모든 계절이 그저 굵직한 몇몇의 이름만으로 모아지는 것에 내세울 핑계. 아마 그 날, 그 날, 또 그 날 역시 다 이 때문일 테다. 누구에게나 있을 지난날의 장면. 볼 옆으로 날아가던 입김의 색깔과 손을 스쳤던 바람, 공기 냄새, 달빛의 농도, 발걸음의 무게 같은 것들은 의도치 않게 또렷이 남는다. 그리고 얼마 동안 그 추억을 뜯어먹고 살지. 영영 그럴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점차 알 수 있다. 기억 속 지나친 행복과 아련함이 주는 무게가 매일 밝아오는 오늘에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그것은 잘 살다가도 문득 비틀거리게, 속수무책이게 한다. 그러다 더는 날것으로 둘 수 없다 결심하고 만다. 저리로 밀어 두고 보지 않으려 들기 시작하면 계절은 옅어진다. 삶이라는 장르는 가혹해서 나날이 예쁘게 빛바래는 추억을 안고 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게 잊어간 계절의 이름은 못 부를밖에. 그러니 너무 서운해는 말라고 전한다. 모든 추운 계절을 어느 겨울이라 말하고 마는 사연이 각자에게 있으니.
나는 이름 없는 계절들을 좋아한다. 여전히 단 한 번 이름 불리우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은 헤아릴 수 없지만. 자꾸 불러보고 싶다. 습한 여운과 바삭한 바람의 진행, 도사린 봄햇살의 온기가 있던 날. 내가 그 이름을 끝내 모르더라도 이렇게 부르면 전해질 수는 있는가. 가지 말라 떼를 쓰면 어떨까 하고.
다시, 모든 무명의 계절에게 꼭 다시 오라 껴안고 말하련다. 그 안에 작은 잎사귀처럼 떨며 살아온 내가, 내가 기다겠리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