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세 번째 편지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USB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아주 오래전에 써놓은 어설픈 소설이 들어 있었습니다.
파일을 열어 몇 페이지를 읽다가 웃음을 내뱉었습니다.
글이 유치해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모른 척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웃음이었지요.
글을 쓰고 싶다는 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구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 눈으로 관찰하고 싶다는 욕구, 그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민낯의 제 자신을 바로 직면하는 게 버거워서 판타지 세계관을 빌려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비밀 일기를 쓰는 것처럼 소설에 집중하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공모전을 발견했고, 웹소설 플랫폼의 공간에서 저만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웹소설 플랫폼은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전공하지 않아도, 등단하지 않아도, 상상만 있다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죠.
첫 소설을 쓰면서 저는 인물에게 불행을 주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이야기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갈등과 고통이었지만,
그 불행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불행한 인물이 끝내 구원을 받고 성공하는 서사는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저 역시 그런 감각에 익숙해져 있었고 더 강한 자극을 주는 소설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주인공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숨 막힐 정도로 치열한 경기를 보다가 지친 느낌이랄까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어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소설을 썼는데, 출간 제안을 받았을 때는 솔직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출간을 제안한 편집자님께 수익이 얼마 나지 않을 텐데 괜찮겠느냐고 되물었을 정도니까요.
전자책 발간 후 한 플랫폼에 달린 한 독자님의 댓글이 기억납니다.
요약하자면 “주인공이 별로 불쌍하지도 않고 재미가 없다.“라는 내용이었는데, 독자님이 무척 화가 나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했다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요.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혹평을 직접 눈으로 보니 마음이 아프더군요.
설명해야만 하는 고통, 비교 끝에 살아남은 불행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소설을 시작했으니,
독자님이 그런 저항감이 드는 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출간된 소설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는 친구와의 우정을 주제로 다뤘고, 남주에 의한 구원과 속이 시원한 전개도 없습니다.
빠른 해결과 즉각적인 감정 소비가 주가 되는 웹소설 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이 제 소설에 재미를 느끼기 힘든 게 당연한 겁니다.
제 소설 속에 주인공은 제 기준으로는 충분히 상처받았고,
남이 보기에는 상처가 크지 않아 보이지만,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일상 속에 상처가 파고들어 주인공을 서서히 갉아먹었습니다.
불행히 충분히 크지 않다는 이유로 가볍게 지나쳐지는 고통을 바라보며,
우리가 고통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아닌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충분히 불행하고 실컷 망가져야 ‘회복의 자격’이 주어지도록 여겨지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는 일이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감각까지 무뎌지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을 향한 무감함,
그건 독서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겠지요.
이 정도로 힘들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더 아픈 사람도 많은데 이쯤은 견뎌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며 고통이 표현되지 못한 채로 가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제 자신을 가시처럼 찔렀습니다.
저는 소설 쓰기를 통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무디고 흐린 눈으로 제 가슴의 상처를 들여다보려니 얼마나 힘이 들던지요.
그래서 제가 보는 제 글이 무디고 흐리게 느껴지나 봅니다.
저는 제 안의 고통을 감지하고 바라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제가 쓴 소설은 제 자신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치유를 돕기도 합니다.
저를 찌르던 가시를 빼내고 조금 여유가 생기니 타인의 고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고통과 불행이 경쟁처럼 소비되는 풍경 속에서
얼마나 더 아픈지가 아니라,
아프다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여유가 생기길 제 자신에게 바라게 되었습니다.
전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 초보 작가입니다.
제가 만든 소설 속 세상의 캐릭터 뒤를 쫓아다니며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하는 대화를 받아 적기에도 분주한 상태지요.
언젠가 제 안의 캐릭터와 속도를 맞추어 그들의 고통을 차분히 글로 옮길 수 있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당신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고 수치를 측정하려 했던 행위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명하고 세심한 눈을 키워서 당신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한 사람의 고통을 늦게 마주하고 끄적였던 시를 전해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혼자만 기억하는 노래> - 윰세
혼자 남길 기다렸겠지
외로움을 닮은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구겨 넣어
비틀어진 잡동사니 같았니?
껍질만 남은 매미허물처럼
넌 메마른 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구나
쿵-
땅을 울리는 타격음
뒤이어 찾아온 비명 소리
매앰애앰 울던 아이가
곤두박질치는 걸 봤어
넌 바닥에 누워
마지막 울음을 내뱉었지.
한때 성가시기만 했던
메아리만 남긴 채,
산산이 부서졌어.
차가운 바람 속에서 넌 여전히
갈라짐으로 매달려있고
그 아이의 잊혀진 노래를
나 혼자만 기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