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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 설렘과 책임감 그 언저리

입사

by crystal

다른 길을 가는 방법을 몰랐고 길을 바꿔 걸어갈 자신감도 없었다.

그래서 난 안전한 그 길을 따라 그저 걸었다.



스물다섯.

시작의 순간을 떠올리니 슬며시 웃음 지어진다.

그날의 앳된 얼굴의 풋풋함이 떠올라서일까

사회인이 되었다고 어설프게 치장한 모습이 부끄러워서일까

돈을 쓰는 사람에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된 뿌듯함에 기인해서일까


나의 청춘...

한 문제 한 문제에 목숨 걸듯 울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영어를 애써 들으며 토익 점수에 매달렸었다.

나의 정체성과 꿈을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시험공부만 매달렸고 자기소개서를 밤새워 쓰며 비로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렴풋 알아 갔다.

서류, 인적성, 면접의 취업 관문을 가슴 졸이며 힘겹게 한 단계씩 넘어설 때마다 그게 인생의 전부인 것 마냥 여겼다.

늘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위해 인내하며 보내온 내 시간은 결국 회사 로고가 담긴 작은 배지 하나로 보상이 되었다.


어릴 때 수 없이 꿈꾸던 내 다양한 장래희망은 모두 사라지고 나에게는 회사원이라는 한 번도 장래 희망에 적어본 적 없는 장래가 펼쳐졌다.




청바지에서 정장으로 옷을 바꿔 입고 그곳에 장래 희망과 맞바꾼 작은 배지를 자랑스레 달고 첫 출근을 했다.

옷이 어색했고, 그래서 걸음걸이가 어색했고, 어색한 건물에 어색한 웃음으로 들어갔다.

그 어색함을 크고 씩씩한 목소리로 감춰 인사하고 두려움을 거짓된 미소로 겹겹이 포장해 봤다.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는 말을 자주 했고, 정말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해보겠다는 말을 그럴싸하게 했다.

때론 그 어색한 공간에서 밤을 지새우며 아침을 맞이해야 했고, 그것은 나에게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하지만 날이 거듭 될수록

나의 얼굴도 나의 말투도 나의 열정도 조금씩 진실됨을 잃어 갔다.

가면 속 나와 가면 쓴 내가 가끔 헷갈리는 순간이 오면

한평 남짓한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 가면을 잠시 벗어두고 눈물로 얼굴을 씻어 내곤 했다.

그러고 나서 별수 없이 가면을 다시 썼다.


나는 대한민국 정규 교육 과정을 착실히 이수했고 점수에 맞춰 전공을 택하고, 전공이 이끄는 곳에 취업했었다.

다른 길을 가는 방법을 몰랐고 길을 바꿔 걸어갈 자신감도 없었다.

그래서 난 안전한 그 길을 따라 그저 걸었다.




그 길을 걸으며 마주친 인생의 퀘스트를 늦지 않게 달성하듯 26살 되던 이른 나이에 결혼을 결심하고 그다음 해에 기혼녀가 되었다.


결혼 준비 기간 동안 대학로에서 파주까지 70Km 거리를 출퇴근해야 했다.

매일이 야근이라 집에 오면 자정이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다시 해야만 하는 고시생과 같은 삶이었다. 장거리 이동과 잦은 야근은 20대 체력으로도 무리였는지 사무실에서 쓰러질 정도로 나의 한계를 마주했다. 매일 울면서 출근했고 눈뜨는 게 괴로웠다. 그땐 그만 두면 될 일을 그러지 못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무직으로 경로를 바꾸는 건 이제 막 가족이 되려는 사람에게 무임승차 하는 것처럼 불편했고 더 솔직하게는 지금까지 해둔걸 모두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용기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가다 나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K장녀로 사는 것만으로도 난 무게감을 느꼈는데

아내, 며느리의 역할이 추가되니 나의 인생은 더 나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은 눌러두고 역할에 대한 책임감에 집중한 채...

결혼했으니 아이도 낳아야지 생각하며 다음 퀘스트 "기혼녀의 출산"을 향해 한 걸음씩 또 그저 걸어갔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봐온 TV속 멋진 여자들처럼 일도 잘하는 능력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설레었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던데, 평생을 전업 주부로 살아온 친정 엄마와 다르게 난 더 멋진 다른 삶을 살 것이라 겁 없이 기대했다.

드라마 이야기, 옆집 시댁 이야기, 나의 성취를 대신해줄 아이의 교육 이야기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존경스러운 엄마의 모습을 감히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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