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낚시는 가장 단순한 도구를 사용하여 가장 어렵게 얕은 민물에서 예민하기 짝이 없는 송어나 연어를 낚는다. 플라이 낚시에 필요한 도구는 낚싯대, 낚싯줄, 그리고 릴. 심지어 릴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이긴 하다. 정작 없으면 번거롭기는 해도. 낚싯대, 줄, 릴, 이 세 물건은 원시적인 형태로부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단순하게 생겼다고 해서 싼 물건은 아니다. 단순해 보여도 좋은 플라이대는 다른 낚싯대 수백 개 정도 가격을 호가한다. 릴또한 마찬가지다.
바늘은 보통 미늘이 없는 바늘을 주로 쓰는데, 캐나다는 주에 따라서 규정으로 정해져 있기도 하다. 미늘이 없다는 것은 연어를 낚았어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면 놓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또한 잡았다 놔주는 catch and release를 할 때에도 물고기가 상처입을 가능성을 줄여준다.
낚시의 목적이 물고기를 낚는 것에 있다고 본다면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마치 태공망이 바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워 세월을 낚듯이 플라이 낚시는 마치 물고기를 잡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마치 원래 있던 것 같이 실을 벌레 모양으로 매듭진 바늘로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유혹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번 걸었던 고기라도 자칫하면 빠져나가기 쉬운 미늘 없는 바늘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세상에 물고기를 확실하게 자극하고 꾀어내는 좋은 루어가 얼마나 많은데.
간소한 도구를 활용하여, 몸의 리듬을 통해 숙련된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플라이를 날리는 동작은 손과 팔을 쓰는 것 같지만 다리와 허리의 움직임을 조화롭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기술은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어느 순간 그림 같은 아름다운 캐스팅이 이루어진다. 물고기를 얻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단순한 도구로의 환원. 최소한의 준비, 온몸으로 체험하는 자연의 존재. 이것이 플라이 낚시의 장점이자 의미이다. 홀로 서서 자연의 비밀로 가득한 무한한 경치를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 거대함 속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서로 어우러진 듯한 감정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 소소한 순간 속에서 우리는 거대한 자연의 조각을 발견하며, 그 경험은 낚시를 넘어 축복이 되어 돌이 온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어린 브래드피트가 낚시를 배우며 자연의 리듬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로회 목사였던 브래드피트의 아버지는 자연의 리듬을 배우는 것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 신의 섭리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더욱 단순한 수단으로 자연을 마주하며, 우리는 오히려 그 모든 영혼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연어를 따라잡기 위한 시도가 심지어 해뜨기 직전 어슴푸레한 물안개가 감싸는 순간에 끝나곤 할 때, 밤새 차가워진 물 사이로 연어가 살금살금 헤엄치는 풍경을 마주할 때, 우리는 낚시 목적을 훌륭한 경험으로 대체한 셈이다.
홀로 서면서도 거대한 자연 속에서 그 풍경을 목격하는 순간, 그 감정은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모종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거대한 자연의 단면을 훤히 바라보며 마주하는 그 감정은, 자연의 위대함 속에서 작은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게 한다. 우리가 엿본 자연의 막막함은 낚시라는 행위를 잊게 하고 환희가 되어 돌아온다. 이는 칸트가 '숭고한 감정'이라 표현한 그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브래드 피트는 미래의 직업으로 낚시꾼을 꿈꾼다. 세상을 좀 더 아는 형형은 그런 직업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요새는 프로 낚시꾼들이 있는데 형이 잘 몰랐나 보다. 재미는 찾지 못하겠지만, 그 대신 좋은 월급을 얻는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형과, 여전히 시골에서 즐거운 낚시 생활을 즐기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동생. 어느 길이 더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