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엄마가 유독 허리 아프다는 소리를 자주 했다. 나는 그 소리가 '밤 되니 좀 출출하네. 야식 땡기네.'처럼 심상하게 들렸다. 엄마는 내가 다섯 살 밖에 안 됐을 때도 허리가 아프다고 자주 밟아달라고 했다. (그때 엄마는 겨우 서른두 살이었다.) 다섯 살의 나는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엄마 손가락까지 꾹꾹 밟아주었다. 그럼 엄마는 '우리 딸 밖에 없네. 너무 시원해.' 하고 좋아했다. 언니가 밟아줬을 때도 같은 소리를 했고 나중에 남동생이 태어나자 딸을 아들로만 바꿔서 '아들 밖에 없네. 너무 시원하다.'라고 말했으니 엄마 허리통증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2018년의 나는 서른이 훌쩍 넘었고 엄마 허리를 밟아주기엔 너무 무거워져 버렸다.
"빨리 병원 좀 가 봐. 병 키우지 말고." 하면서 파스를 붙여주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엄마는 동네에서 제일 큰 종합병원에 갔고 갈비뼈에 금이 갔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니 갈비뼈에 금이 갔는데 '허리가 좀 아프네'라니... 도대체 엄마는 얼마나 아파야 '아이고 나 죽네' 앓는 소리를 할까?
한평생 참는 게 숨 쉬듯 익숙한 사람. 그게 우리 엄마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보호대를 착용하고 치료를 받아도 뼈가 잘 붙지 않았다. 오히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종합병원에서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했던지 외뢰서를 써주셨고 우리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병원에 진료를 보러 갔다. 당연히 정형외과로 가겠거니 했는데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얼마 후 내가 홀로 마주 앉게 된 사람은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이었다. 엄마가 구강검진을 하러 간 사이 혈액종양내과 간호사가 나에게 전화를 해서 교수님께서 보호자인 나하고만 먼저 면담을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콰광!! 하고 벼락이 쳤다.
'혈액'과 '종양'과 '내과'의 상관관계도 알지 못하는 나. 엄마의 보호자로 따라오긴 했지만 아직 나 스스로도 보호하지 못하는 나약한 나. 엄마 없인 아직 어린애일 뿐인 나에게 엄마를 두고 혼자 와서 뭘 하라는 걸까?
"어머님은 혈액암입니다."
다시 한번 콰광!!
"다발골수종이라는 혈액암이에요. 다발골수종의 가장 흔한 증상이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지는 겁니다."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내 '암'이라는 단어에 압도 돼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내가 슬픈 드라마 속에 덜컥 내던져진 초짜 배우 같았다.
그렇다면 다음 대사는...
"안 돼요!! 제발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너무 놀라서 건강이 더 나빠지실 거예요."
내가 내던져진 드라마는 뻔한 신파극인 걸까? 내 입에서 식상한 대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교수님은 나처럼 드라마 주인공 역할에 몰입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오셨는지 전혀 감흥이 없으셨다. 차트에서 눈을 떼지도 않으신 채로 내 대사를 받아치셨다.
"그럴 수는 없고요. 환자에겐 알 권리가 있고요. 너무 늦게 알릴 경우 저희에게 책임이 올 수도 있습니다. 또 환자와 치료방향도 결정해야 하고요."
"(머쓱하게 콧물을 닦으며) 씁, 하긴 그렇죠."
"그래도 조금 기다려 드릴 테니 기회가 되면 어머님께 먼저 말씀을 좀 드려놓으시죠."
진료실 문을 닫고 나왔으나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실감도 나지 않았다. 일단은 언니와 동생에게 알려야 했다. 나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크고 벅찬 일이었다.
"언니 큰일 났어. 엄마가 암이래. 어떡해."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암'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얘기하자 그제야 이 상황이 명확한 사실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전화기에 대고 한참을 어떡하냐는 답 없는 질문만 서로 반복하며 오열했다.
"왜 울어?"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아 울고 있던 나는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엄마가 이송기사님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나를 보고 다가온 것이다. 분명 제일 사람 없는 복도 구석으로 왔는데 하필이면 그 동선으로 지나가던 엄마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래서 엄마의 병을 숨긴 채 태연하게 웃어 보이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은 순식간에 깨져버리고 엄마에게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나중에 친구한테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유호가 구석에서 서럽게 울고 있더라고. 그걸 보는 순간 바로 내가 큰 병 걸린 거 알았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
다시 생각해도 미안한 순간이다. 그 뒤로 엄마랑 병원생활 6년을 함께 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엄마 앞에서 울지 않았다.
엄마가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들어가던 그날만 빼고 말이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 우리는 언제나 주인공이라지만 항상 행복한 일만 일어나는 연극은 없다. 때때로 우리는 비극적인 상황에 내던져지기도 하는데 이때 기막히게 멋진 반전의 대본으로 나를 이끌어줄 작가 역시 없다. 스스로 대본을 쓰고 알아서 헤쳐나가야 한다. 문제는 언제 어디에서 내가 비극적인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엄마의 죽음> 편을 진작 한 번이라도 써볼걸.
오늘도 뒤늦은 후회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건강검진을 미루는 부모님들이 계시다. 귀찮아서, 겁이 나서, 돈이 아까워서, 대장내시경 하려면 역겨운 물을 많이 먹어야 돼서, 일을 크게 만들까 봐. 그러나 건강검진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일을 크게 만드는 일이다. 모든 병은 초기에 발견해서 치료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은 치료법이다. 고집을 부리는 부모님이 계시면 그냥 건강검진을 예약해 버리도록 하자. 그리고 돈을 이미 냈다고, 환불이 안 된다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검진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가벼운 감기는 동네 내과를 이용해도 되지만 어딘가 지속적으로 불편하면 최대한 빠르게 대학병원으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엄마의 경우에도 처음 허리가 아플 때 나름 규모가 있는 종합병원의 정형외과로 갔다. 그래서 뼈에 금이 간 것을 확인했지만 병원에서는 그것을 '다발골수종'이라는 혈액암과 연관 짓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런 케이스를 보는 일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병원에 갔을 때는 정형외과를 예약해서 갔지만 바로 혈액종양내과로 보내졌다. 그러느라 허비한 몇 달의 시간이 아쉽긴 하지만 그때라도 발견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치료는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니 거리를 생각해서 나중에 병원을 옮기더라도 진단은 무조건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크고 유명한 대학병원으로 가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