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들은
내가 주로 해왔던 육체적 운동은 필라테스, 요가 등 대부분 근육을 찢는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었다. 요즘 들어 다시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그런 식의 운동은 하기 싫어진 걸 느끼며, 참는 걸 잘해왔던(?) 내 성향 때문에 운동을 선택할 때도 그런 선택을 해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근력 운동이 뭐 다 그렇겠지만 말이다.
참는 걸 잘하면 꽤 피곤해진다. 예를 들어 어떠한 감정이 생겨나도 바로 표출하지 못하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집까지 들고 와서는 내가 이런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것인지 시시비비를 가리게 된다. 일단 참느라 표출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감정은 어딘가에 꼭 쌓인다. 이러한 방식으로 내가 나를 억눌러 왔다는 걸 인지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는 꽤 오래된 습관이다. 그렇기에 이를 알아채고 나서 감정을 그때그때 해방하려 노력해도 금세 바뀌지는 않더라. 그걸 굳이 다시 꺼내어 따져보기도 했지만 도리어 내 힘에 부쳤다. 그래서 미처 해소하지 못한 감정들은 차분하게 눈을 감고 명상으로 삭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전혀 차분하지 않은 감정들을 침착한 척 명상으로 익삭이는 게 지쳐가던 어느 날 동적 명상을 처음 접할 기회가 있었다. 앞에서 명상을 안내해 주시는 한 분이 계시고 대여섯 명 되는 초면의 사람들과 같이 몸을 움직이며 하는 명상이었다. 몸을 움직이며 하는 명상의 방식은 자유로웠다. 먼저 몸을 푸는 가벼운 스트레칭들을 하고 음악 소리에 맞추어 손가락부터 팔과 다리 머리 등을 서서히 움직였다. 처음엔 소심하게 서 있는 자리 주변에서만 슬금슬금 움직였는데 음악 소리가 경쾌하게 커지면서 몸동작도 자연스레 커졌다. 명상실을 휘휘 거닐다 보니 신이 나고 땀도 났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과 부딪혀도 괜찮으니 눈을 감고 뒤로 걸으며 움직여보라는 가이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딪히는 게 두려웠지만 시키는 건 또 잘하는 나라서 마구 걷다가 툭툭 부딪혔다. 부딪힐 때마다 죄송하다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려니 하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몇 번 서로 부딪히다 보니 두려운 감정은 걷히고 익숙해지면서 이 상황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서 마지막 가이드로 마음속에 있던 상처, 아픔, 슬픔, 한 등등 여태껏 억눌러왔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털어 내보라고 했다. 명상 안내자가 먼저 ‘허어- 하아아-’하고 포효하는 소리를 내며 몸에 켜켜히 쌓인 묵직한 것들을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털어내는듯한 동작을 보여주고서 말했다.
동작을 따라 하고 소리를 내며 내 마음이 짓이겨지고 몸이 아플 지경의 경험들이 하나둘 떠올랐고, 이어서 버려질까 두려워 모든 상황을 참고 견디려 애써왔던 가여운 아이가 떠올랐다. 그런 것들을 계속 바닥까지 털어 내다보니 어느 순간 불쾌한 감각들을 머리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감내하는 걸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참는 건 이제 좀 지겹다. 나를 위하지 않는 것들은 더는 참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한, 내쳐지지 않기 위한 비뚤어진 이기심으로 나를 괴롭혀온 지난날을 반성한다. 무엇보다 그런 나를 기꺼이 용서하며 흘려보낸다. 결심한다고 해서 갑자기 뿅 하고 사람이 바뀔 일은 아니란 걸 알기에 참느라 애쓴 만큼 매 순간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충분히 아파했기에 이제 새로운 근육이 돋을 때가 온 것 같다.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길 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