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진짜 탱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함께 지냈던 J는 휴대폰으로 탱고 영상을 내게 보여 주었지. 어젯밤 클럽에서 찍어온 것이라고 했어. 화려한 무대 위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댄서들은 평면의 화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 애절한 감정으로 뒤엉켜 휘감겼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데, 현란한 몸짓에 내가 다 아찔해지더라고.
큰 클럽의 공연은 멋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다른 곳에서 탱고를 보겠다고 마음먹었어. 탱고의 발상지라는 라 보카(La Boca) 거리에서 날 것에 가까운 탱고를 느껴보고 싶었던 거야. 늦은 오후, 식어가는 햇살이 라 보카 거리를 비추었지. 알록달록한 건물들은 과거 이곳에 모여든 가난한 이민자들의 사연만큼이나 다채로웠어. 탱고의 슬픔과 그리움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
탱고의 영혼이라는 반도네온(bandoneon) 소리를 좇아 걷다가 그들을 만났지. 셔츠단추가 터져버릴 듯 단단한 가슴을 가진 남성 댄서는 머리부터 구두까지 윤기가 흘렀고, 잘록한 허리에 체리색 드레스가 휘감기던 여성 댄서는 한 스텝 스텝마다 농염한 미소를 흘렸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어. 그들의 탱고는 영상으로 봤던 공연과는 달랐거든. 느렸지. 템포 사이에 구멍이 난 것처럼.
그건 손님들을 위한 배려였어. 사진으로 남길 만한 동작에서 잠시 멈춰주었던 거야. 공연이 끝나고 그들은 레스토랑을 한 바퀴 돌며 팁을 받았지. 돈을 더 내는 사람과는 함께 포즈도 취해 주었고. 왜 탱고사진하면 떠오르는 그런 자세 있잖아. 그러니까 그들의 춤은 호객용 B급 퍼포먼스였던 셈이야.
순간 서글픈 마음이 들더라고. 그들이 탱고를 처음 시작할 때 품었을 꿈이 떠올랐어. 돈과 명예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무대에 서겠다는 포부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현재의 모습은 그들이 처음 그렸던 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았어.
어떤 분야에서든 별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최고의 자리는 아니더라도 번듯한 무대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런 소망.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며 쓸쓸히 접게 되는 그것들.
<미생>에서 장그래는 프로 바둑기사에 대한 꿈을 단념하며,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마음을 정리하지. 재능이 부족했거나 운이 없었거나 주변 환경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아프니까. 그냥 열심히 하지 않은 것으로 하자고.
별이 되지 못한 수많은 꿈들에게 가슴 시린 그 위로를 전해야 하나? 아픈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나는 댄서들의 얼굴을 보았지. 관객들과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미소를. 화려한 무대는 아니지만 보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스스로 행복하다면, 별이 되지 못한 꿈의 조각들은 흩어져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르게 빛나는 게 아닐까.
탱고는 라틴어로 ‘가까이 다가가다, 마음을 움직이다’는 뜻이 있다더군. 비록 노천 무대였지만 최선을 다한 당신들의 모습은 정말 멋졌어. 마음으로 다가가 마음을 흔들었다면 충분히 성공한 거야.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B급 퍼포먼스라고 했던 말, 취소할게. 세상에 둘도 없는 훌륭한 탱고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