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가 사람을 남긴다는 건
요즘은 카카오톡에 그날그날 생일인 친구의 이름이 뜬다. 그래서 챙겨야 하는 친구나 지인의 생일을 깜빡 잊고 지나가 버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중요한 일도 돌아서면 잊기 일쑤인 나에겐 꽤나 유용한 서비스지만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생일까지 알게 되어 연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 아닌 고민도 하게 된다.
얼마 전 카카오톡 생일인 친구에 이전 사장님이 떴다. 전 회사는 인수 합병 등으로 사장님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그중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한 분이었다.
평사원일 때야 사장님을 직접 대면할 일이 별로 없지만, 중간 관리자가 된 이후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의 관리자 회의나 가끔 팀에서 추진하는 업무 보고 때문에 사장님을 대면할 일이 이따금씩 있었다.
사회생활(?) 좀 한다는 누군가는 업무 외의 없는 자리도 만든다고 하지만, 나는 직속 상사에게도 붙임성 있게 서글서글 말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터라 상사와 함께하는 자리가 그리 편하지 않았다. 그것도 회사의 '대빵'인 사장님은 오죽했을까.
어느 날, 점심시간을 이삼십 분 남긴 시간이었다.
"〇〇팀장, 오늘 점심이나 같이 하지."
갑작스럽게 점심을 같이 먹자는 사장님의 전화였다.
"오늘이요? 아, 저 오늘 점심 약속 있는데요."
"아… 그래…. 그럼 점심 맛있게 먹어요."
어색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야 '무안하게 내가 너무 칼같이 거절했나, 이러면 안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슬쩍 들었지만 어쩌겠나.
사장님은 보수적인 기업의 수직적인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하셨던 분으로, 이 회사에 오신 후 비교적 수평적인 조직 문화의 회사 분위기에 맞추려고 노력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과도 자주 만나 대화하는 자리를 가지려 한다고.
‘소통하고 싶은 거면 미리 약속을 하셨어야지. 사장님이라고 아무 때나 밥 먹자고 하면 직원은 '네.' 하고 먹어야 하나?'
이런 식의 전화 역시 직원들과 편하게 소통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권위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때는 인수 뒤 바뀐 경영진들이 모두 이방인처럼 느껴졌던 데다 나의 포지션도 원치 않게 바뀐 상태라 뭐든 색안경을 끼고 보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마음이 그랬다.
그 후에도 사장님은 명절에 먼저 안부 메시지를 보내셔서 ’앗, 내가 먼저 인사를 했어야 하나?‘ 하는 민망함과 찜찜함(?)을 안겨 주시기도 하고, 가끔 읽어 보면 좋을 거 같다며 책을 선물해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세심하게 직원들을 챙기는 사장님의 모습을 그때는 조직원들을 이끌어 가기 위한 리더의 사회생활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2년 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가졌던 거부감이 차츰 사라지고 신뢰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이 조금씩 자리 잡을 무렵 그분은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사장님이 회사를 떠난 후 직원들 중에는 사장님에게 연락을 하고 만난다는 이들도 여럿 있었지만, 여전히 사회생활이란 걸 통 못하는 나는 명절에나 한두 번 문자 메시지로만 간간이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몇 년 뒤 나도 회사를 나오고 맞은 올해 생일날이었다. 잊고 지냈던 사장님에게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카카오톡에 뜬 생일을 보고 연락하신 듯했다.
〇〇팀장 잘 지내시오? 오늘 생일이지요? 축하해요. *****에서 나왔다는 얘긴 들었소. 우린 직장인이기 이전에 직업인이라고 생각합시다. 씩씩하게 지내요. ^^
이제는 함께 일하며 동기를 부여하고 사기를 올려 주어 역량을 끌어올려야 하는 조직원이 아닌, 그저 이전 회사 직원이었던 내게 따뜻한 위로와 함께 안부 메시지를 보내신 사장님의 그 마음이 느껴졌다. 함께 일하는 동안 조직의 부속품이 아닌 중요한 한 사람으로 존중받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뭉클했다.
기업의 가장 큰 자원이자 경쟁력은 사람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정말 사람을 중요하고 귀하게 여기는 회사의 리더가 얼마나 될까? 성과를 내기 위해 필요할 때는 회사의 주인처럼 대하다 조직의 부속품처럼 사용(?)하고 형편이 어려워지면 내치는 모습은 많이 봐왔지만, 사람을 귀중하게 여겨 사람들이 스스로 따르게 만드는 리더, 사람을 남기는 리더의 모습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카카오톡에 뜬 사장님 생일을 보고, 이번엔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일랑 하지 말고 바로 연락 드리려고 했다. 그러다 연락 한번 없이 지내다 갑자기 챙기지도 않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백수로 놀고 있는 마당에 연락하기도 뭐해서 결국은 문자 메시지를 쓰다 말았다. 참, 일관되게 사회생활엔 영 재주가 없는 나다 싶다.
그치만 이번 연말에는 추운 날씨에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는 평범한 문자 한 통이라도 꼭 드려야겠다고, 이 글을 쓰며 마음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