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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당근 Nov 12. 2020

떠나는 부장님이 남기고 간 한마디

버티는 것에 대하여

직장 생활을 하며 회사가 인수되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흔한 일일까? 기업의 인수 합병 관련 뉴스는 종종 듣지만, 그건 정말 TV에서나 나오는 일이지 내가 다니는 회사가 실제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회사가 다른 기업에 팔리고 하루아침에 대표와 경영진이 바뀌는 상황은 조직원들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사건이다. 고용 승계가 된다고는 하지만, 조직이 바뀌는 것은 개개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경영 방침이나 사업의 방향성은 물론이고 업무 분위기 등 기업 문화 역시 크게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또 그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사람들과 새로 합류하게 된 사람들 간의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인수가 된 후 한동안은 새로운 경영진과 기존의 조직장들과의 갈등이 꽤 깊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양쪽 편이 갈라지는 상황이 되었고, 그런 와중에 발 빠르게 어느 편인가에 줄을 서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파벌이나 줄 서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업무 관계나 친분 등에 따라 어느새 어느 한쪽 라인에 속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반대편이라는 흑백논리로 사람들이 갈리는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상황이었달까.

내 상사였던 부장님은 새로운 경영진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굵직한 사업 계획에서부터 세부적인 일들까지 부딪치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 결국은 회사를 떠나게 되셨다. 본인이 사직서를 냈다고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자의적인 퇴직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내용까지야 알 수 없지만 사직에 대한 압박이 있었음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같이 일해 온 상사의 퇴직, 그것도 어떤 힘에 의한 퇴직이었기에 남아 있는 조직원들의 충격은 더 컸다. 그동안 회사는 망하지 않는 한 내가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는 곳이라는 아주 순진한 생각을 하며 다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더 이상 우리의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된 것이다.


곧이어 조직이 새로 개편되면서 본래의 자리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되거나 직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생겨나는 상황을 보며 부장님은 회사에 남은 조직원들의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나 역시 그동안 하던 일을 두고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었다. 순환 보직이란 것이 조직의 구성원이 주기적으로 여러 직무를 바꾸어 담당함으로써 다양한 업무를 익히며 다방면의 능력을 키울 수 있게 하는 제도라고는 하나 10년 넘게 전문적으로 해 오던 업무 대신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된 상황을 선뜻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부장님도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나와 몇몇 조직원들에게 떠나기 전 힘주어 이야기하셨다. 아마도 우리가 혹여 홧김에 대책 없이 나가지 않을까 우려해 하신 말씀이었을 거다.


“버텨.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부장님이 떠나며 남긴 그 한마디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나는 버텼다.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새 상사도, 그리고 신입처럼 처음부터 배워야 했던 새 업무도 적응해 가며 버텼다. 확 관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었지만 참았다. 그냥 그만둬 버리면 지고 도망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난 누구를 상대로 싸움을 하며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리고 난 그 싸움에서 이긴 걸까?

나를 새로운 부서로 보낸 경영진이나 힘들었던 그 상사와의 싸움이었다면, 내가 이긴 걸 수도. 결국은 경영진들도 몇 년 뒤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었고, 그 상사 역시 회사를 떠나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니 그때 당시엔 그들보다 오래 버티고 남은 내가 이긴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부장님이 남긴 이야기처럼.      


그렇게 몇 년을 더 버티고 버티며 다녔던 회사를 결국 나오게 된 지금, 다시 생각해 본다. 버티는 것이 정말 이기고 지는 싸움이었는지. 그리고 그만둘 용기가 없어 버텼던 것은 아닌지.

물론 버티고 지낸 그 시간 동안 얻은 것도 많다. 다른 분야의 직무를 익히며 업무 영역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고, 새로운 일을 배우고 진행하느라 힘들었던 만큼 성취감과 보람도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또 힘든 시간을 견디고 난 이후 이전보다 좀 더 단단해졌다.

하지만, 버티는 데 너무 힘을 쏟느라 회사 밖의 다른 수많은 기회를 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회사에서 버티는 방법도 있지만, 회사를 나가는 방법도 함께 고민해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회사 밖에는 내가 일할 수 있는 또 다른 회사가, 아니 또 다른 많은 길이 있지 않았을런지.


그래서 지금 누군가가 회사 생활을 힘겹게 버티고 있다면 이야기해 주고 싶다. 회사에 남기 위해 버티는 힘을 나가서 다른 길을 찾는 데 써도 된다고.


“버텨. 그런데 나가는 것도 괜찮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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