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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사법살인, 조봉암 독립유공자 인정도 훼방

[두 개의 동상] 조봉암과 이승만

by 뉴스하다

죽산 조봉암은 이승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독부 이승만은 라이벌로 떠오른 조봉암에게 간첩죄 등을 덮어 씌워 죽였습니다.


대법원이 조봉암에 무죄를 선고했음에도 뉴라이트 세력은 사법살인 정당화를 멈추지 않습니다.


조봉암이 독립유공자임을 인정하는 서훈 역시 여전히 유보 상태입니다.


뉴스하다는 이승만이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을 제거해야 한다”고 발언한 자료를 국가기록원에서 찾았습니다.


조봉암이 2011년 대법원 무죄 선고 이후에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이유와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이승만 국무회의서 “조봉암 제거” 지시


1958년 9월 28일 이승만은 제92회 국무회의를 개최한다. 외무부만 빼고 주요부처 장관이 모두 참석했다.


이승만은 첫 번째로 남북통일 관련 발언을 짧게 마친 뒤, 두 번째로 “조봉암은 아직도 공산당원이 틀림없다. 이러한 위험분자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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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같은 해 1월 14일 개최한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벌써 조치됐어야 할 인물이며 사건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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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언급은 세 차례나 더 지속됐다. 1월 14일 국무회의 개최 하루 전인 1월 13일 이승만 정권은 느닷없이 간첩 혐의로 조봉암을 비롯해 진보당 간부 7명을 구속했다.


사법부도 이 사건을 정적 제거를 위한 재판으로 바라봤다. 1심에서 유병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는 3개월에 걸친 심리 끝에 1958년 7월 2일 간첩죄를 무죄 선고했다.


유 판사가 국가보안법만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하자, 이정재를 비롯한 자유당 어용 정치깡패들이 법원청사에 난입해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고 외치며 폭동을 벌였다.


이승만 또한 사법부의 결정을 비판하며 “판사를 처단하려 했다”고까지 말했다.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된다. 그 판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해 중지했다. (중략)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시정해야 한다.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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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이승만은 조봉암에게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누명을 씌우고 이듬해 7월 사형에 처했다. 조봉암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자 사법 살인을 강행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에서 ‘진보당 조봉암 사건’을 이렇게 규명했다.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러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 조사했다. 이후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불법 감금해 재판을 통해 사형에 이르게 한 사건.


진실화해위는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 노릇한 검찰과 사법기관을 맹렬히 비판했다. 민간인 조사 권한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수사한 것도 불법이자 인권침해로 못박았다.


‘이 사건은 검찰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했고,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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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도 스스로 ‘잘못된 판결’이라고 인정했다.


‘재심판결로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 피고인 조봉암. 원심판결과 제1심 판결 중 유죄 부분을 각 파기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 중 양이섭 관련 간첩죄는 무죄, 제1심 판결 중 진보당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검사의 항소는 기각한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부 재심 무죄 판결문.


3.1운동 주도, 고문으로 손가락 7개 잃어


조봉암은 1899년 강화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무살 때 고향 강화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엿장수를 하며 주오대학 정경부에 입학했다. 박열·김약수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 ‘흑도회’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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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관념적 운동에 염증을 느꼈고, 조직력을 갖춘 독립운동 길을 찾아 나섰다. 1925년 경성에서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조봉암은 여운형·홍남표 등과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한인지부를 결성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32년 조봉암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형무소로 압송됐다.


신의주형무소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때 손가락 7개를 잃었다. 1939년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제는 1945년 초부터 태평양전쟁 막바지 수세에 몰리자 조봉암과 같은 독립운동 전력자들을 예비검속해 헌병대 감옥에 가뒀다. 1945년 1월 끌려간 조봉암은 해방 다음날인 8월16일 풀려났다.


정부 미인정 독립운동가 조봉암 유족 ‘恨’


이처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봉암 선생에게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훈포장 수여)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매년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1단짜리 신문기사 때문이다.


‘인천부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 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하여 지난 20일 휼병금으로 금150원을 인천서를 통해 수속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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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그동안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실정법 위반으로 독립유공자 대상에서 제외됐다.


2011년 1월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리고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심사를 다시했으나, 이번에는 이 기사를 문제 삼고 서훈을 보류했다.


같은 해 8월 정관회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장은 대법원의 무죄 판결 이전에는 실정법 위반 때문이고, 이후에는 국방헌금 150원을 낸 게 밝혀져서 심사를 보류한다고 했다.


정 과장은 당시 교사 봉급이 50원이었다고 밝힌다. 150원이면 3개월치 봉급이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 1940년 쌀 중품 80㎏ 한 가마가 22원68전이었다. 150원은 대략 7가마쯤 되는 돈.


150원 국방헌금 기사는 조봉암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기 전까지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죄 선고를 받자 혜성처럼 등장한 것.


조호정 여사 등 조봉암 가족과 관계자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냈거나 조작 가능성있다고 주장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에는 이렇게 기록됐다.


유족 및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등은 당시 조봉암에게 그 정도의 여윳돈은 없었으며,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만큼 기사가 조작됐거나 누군가 조봉암 이름으로 대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원규 작가는 <조봉암 평전-잃어버린 진보의 꿈>에서 당시 상황을 남겨뒀다.


조봉암은 인천비강(쌀겨)업조합장을 맡고 있었다. 조합에 함께 출근하던 처남 김영순 선생은 “조봉암이 당시 10원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이 작가와 인터뷰했다.


조봉암은 1952년 7월께 죽마고우이자 독립유공자인 조광원(1897~1972) 신부를 만난 자리에서 “비강업조합장 자리가 감옥살이보다 힘들었다”며 “걸핏하면 헌금 내라고 시달렸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해줬다”고 말한 증언도 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인 조봉암도 냈다’며 우리 국민들을 현혹해, 국방헌금을 뜯어내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기사에 나온 조봉암 주소지와 실제 주소지가 달라, 신뢰성을 보장할 수 없는 기사로 판단할 수 있다.

조호정 여사 기억에는 당시 집은 소화정(부평)에 있었다. 김영순 선생도 똑같이 증언했다.


일제 관헌자료도 조봉암 거주지를 소화정으로 기록(요시찰인의 언동에 관한 건)하고 있다. 결국 이 기사 내용은 진실성이 결여됐다.


조봉암 선생 딸인 고(故) 조호정 여사는 독립운동가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에게 거는 친일 시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윤봉길 의사 홍커우공원 의거 여파로 피체되어 신의주 감옥으로 잡혀가시고, 이듬해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귀국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중략)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그 엄혹한 시기에, 겉으로는 생업에 몰두하는 척하면서 국제정세를 살피고, 동지들과 연락하면서 때를 기다리던 아버지를 일본 헌병은 치안에 위험한 인물이라고 하여 기어이 다시 잡아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제 헌병사령부에서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감히 입에 담기도 죄송한 친일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어딘가 있다고 하니 이 늙은이에게 또 하나의 한이 되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죽산 조봉암 기록 1899-1950, 오유석 윤충로 박경태 지음,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발췌.


윤석열 정권의 뉴라이트 세력은 조봉암 사형을 정당화했다. 이승만을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로 둔갑시키기 위해서다.


윤석열은 2022년 12월 조봉암의 사형을 정당화하는 취지로 기고문(뉴데일리 2015년 7월 13일)을 작성한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을 임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조봉암 사건을 ‘정치탄압’으로 판단한 기관인데, 윤석열은 정반대 주장을 펼친 뉴라이트 세력에게 진실화해위원장을 시켰다.


뉴스하다 제작진은 조봉암 독립유공자 서훈을 검토했던 모든 기록과 반려사유 등을 국가보훈부에 정보공개 청구했으나 비공개했다.


[이 기사는 뉴스타파함께재단 KINN(한국독립언론네트워크) 탐사보도 기획안 공모전 취재비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뉴스하다는 죽산 조봉암 선생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고, 인천에 석상이 세워지는 그날까지 계속 취재하고 보도하겠습니다.


이창호 기자 ych23@newshada.org

홍봄 기자 spring@newshada.org


〈기사보기〉

https://newshada.org/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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