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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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엄마의 생신을 기념해서 가족들끼리 해외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다들 어렵게 어렵게 일정을 맞춰 베트남에 가게 되었다. 부모님과 여행을 가는 기회도 흔하지 않을뿐더러, 엄마는 살면서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으셔서 첫 여행이 주는 느낌이 좋았으면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더 알아보고 준비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아쉽게도 아빠는 급하게 일정이 생겨서 못 가게 되어서 누나를 포함해서 셋이서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베트남까지 비행기로 5시간 정도 소요되었고, 비행기가 흔들리는 느낌을 굉장히 무섭게 느껴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던 난 잠이 안 오면 읽으려고 챙겨 온 '데일 카네기 - 인간관계론'이라는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당시에 인간관계에 대해서 고민이 있어서 구입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을 읽으면서 감명 깊은 문장은 밑줄을 그어두곤 하는데 정확하게 30페이지 정도 밑줄을 그어두고 책이 깨끗했다. 추측해보건대 그 당시의 나에게 크게 감명 깊었던 책이 아니어서 앞부분만 조금 읽어보고는 집에 있는 사놓고 읽지 않은 많은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던 그 책에 다시금 눈길이 가고, 손이 갔었던 이유는 요즘 들어 관계에 대한 회의감과 고민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관계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땠는지 생각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왜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는지,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만들고 이어나갈 수 있는지 자세하게 나와있는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을 보며 함께 여행하고 있는 엄마와 나의 관계에 적용을 해보고 싶어서 평소에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용기를 내서 엄마와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 있도록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았다.
애석하게도, 그동안 내가 엄마와 이야기 나누는 걸 꺼려하게 된 원인의 이유를 내가 아닌 엄마에게서 찾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완전히 이루고 있을 즈음에 엄마가 좋아하는 돼지갈비를 사드리는 자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엄마의 건강이나 노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정말 진심 어린 마음으로 내 생각과 의견을 전달했지만 엄마는 애써 대화 주제를 돌리거나 침묵하셨다. 나중에서야 누나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는데 내가 했던 말들이 엄마에게는 잔소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에 아차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서운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마음의 벽을 쌓아왔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위해서 했던 진심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엄마가 무정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부터 엄마와 관계에 있어서 속마음을 표현하거나 내 생각이나 마음을 말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꺼려졌고 내가 또 괜한 소리를 해서 엄마가 잔소리라고 느끼면 어쩌지 싶은 마음에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런 상황에서 베트남 여행을 오게 되었다. 물론 엄마와 관계를 극복하고자 '데일 카네기 - 인간관계론'을 선택한 건 아니었으나, 그 선택은 여행 내내 꽤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책을 읽고 생각들이 조금씩 바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첫 번째로, 내가 진심이라고 생각되었던 말들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입장에서 상황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나름대로 엄마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를 드렸던 건 맞지만, 그게 정말 엄마에게 필요했던 말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엄마가 더 듣고 싶었던 말은 진심이 담긴 공감과 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말도 분명 좋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듣고 싶은 말을 건네는 것도 굉장히 멋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로, 말하는 방식을 바꿔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생각이 많아서인지 말하는 걸 꽤나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고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평소에 하는 생각들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번 여행에 있어서 만큼은 엄마에게 많은 포커싱을 두려고 했다. 엄마에게 관심을 갖고 숙소는 괜찮은지, 음식은 입에 잘 맞는지, 아경은 어땠고, 오늘 일정은 괜찮은지 등등 첫 해외여행인 엄마를 위해서 말을 아끼고, 질문을 더 늘렸다.
세 번째로, 다름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놓치고 지나갔던 것들을 여행을 통해 다시금 인지할 수 있었는데, 어쩌면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말과 행동, 식습관 등등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구성원들이 모여서 지내고 있다. 엄마의 생각과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인정하려고 했더니,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이해하는 생각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치열한 일상을 보내며 하루하루 살아가겠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할 수 있는 베트남 여행이라는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조금 더 힘내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것에 가끔은 지치거나 힘들기도 하지만 관계 덕분에 살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여행은 '여기에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