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20년 지기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오랜만에 본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있었다. 하지만 막상 친구들을 만나보니 표정은 어둡고 세상 풍파를 혼자 맞은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세 한탄을 하였다. 자영업을 하는 친구는 코로나와 사회를 욕을 하고 회사원인 친구들은 언제 잘릴지 모를 퇴사의 압박과 월급 그리고 업무에 대한 욕을 하였다. 누가 더 불쌍한지 내기를 하는 듯 '너는 나보다 나아'라는 말을 돌림 노랫말처럼 서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친구들이 처음 회사를 다닐 때도, 결혼을 하고 나서 회사를 다닐 때도, 코로나 이전에 만났을 때도, 우리의 대화는 늘 같았다. '너보다 내가 더 불쌍해' 란 말을 서로 경쟁하듯 말했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거기에 동참에 내가 더 어렵게 사는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득시키려 애썼다.
분명한 것은 20년 전보다 친구들은 성장했고 돈도 더 많이 벌고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사회적 지위에서도 높아져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결같은 자신의 신세에 대한 탓을 하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체감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성장은 조급함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내가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 분노하거나 좌절을 하게 한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 질투와 시기를 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자기 탓을 하기 시작한다.
친구들 역시 자신들의 성장을 느끼지 못했다. 나만이 그들의 성장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보며 '20년 전보다 너희들은 엄청난 성장을 한 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그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라며 다시 누가 더 불쌍한지 내기를 하였다.
이처럼 자신이 얼마큼 성장했는지는 스스로의 태도에 달려있다. '내가 성장했구나'를 인식하는 순간 더딘 성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사소한 태도가 하루를 만들고 하루가 지금 나를 만들었다. 문제가 없는 삶은 없으며 나의 태도로 지금껏 헤쳐나갔다. 결국 나의 최종 목적지도 태도가 데려다 놓을 것이다. 그 태도를 올바른 태도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태도로 만족할 것인가? 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올바른 태도를 바꾼다고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사소한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고 귀찮은 일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감정을 소모될 것이며 한계에 다다를 하루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태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원래의 나의 올바른 태도로 되돌아온다. 올바른 태도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것부터 밥을 먹을 때의 자세와 말하는 버릇까지 일상에서의 나의 습성이다. 그 사소한 태도 하나하나가 하루를 만들고 일 년을 만들고 삶을 만든다.
나는 자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자신을 얼마큼 사랑하냐?'라고 물었다.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당황해했다. 한 친구가 분위기를 깬다며 나에게 욕을 해댔다. 그리고는 속이 제일 편한 놈은 나라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들 모습에 자신을 사랑한다는 질문이 꽤나 부끄러운 것 같이 보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문제가 일어날 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내가 친구들에게 너희는 성공했고, 성장했다고 말해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 사랑을 피한 나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여유가 없으며, 나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될 거라 걱정한다. 상대방의 성공은 나를 가로막는 벽이 된다고 생각라고 늘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산다.
더딘 성장에 쳇바퀴처럼 도는 현실에 좌절과 회의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지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것은 자기 사랑이며, 나에 대한 믿음이고 용기이다. 바라보는 것들이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올바른 태도를 만들어 내는 것도 바로 자기 사랑이다. 자기 사랑은 가진 우리가 바라는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이미 시작되었고, 계속 앞을 향에 성장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