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까지 면세점에서 향수 사는걸 엄청 좋아했다. 일단 향수란 품목 자체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는게 아니다보니, 일상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훌훌 떠날 때 하나쯤 장만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보다. 스위스 루체른역앞의 어떤 호텔에서 향수를 쭉 진열해놓고 하나하나 뿌려보며 냄새를 맡았던 날들도 있었다. 함부르크의 민박집에서 도미토리를 전세내며 지내던 일주일을 향수향에 흠뻑 빠져있던 기억도.
그렇게 지내다보니 집에는 어느새 향수가 쌓여갔고, 돌아와서 이를 일상에서 쓰지않다보니 그 위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한번씩 생각날때마다 향을 맡기 위해 향수를 뿌리지 않고 집어들곤했다. 이 항을 맡으면 스위스의 그 밤들이 떠오르고, 저 향을 맡으면 독일에서의 그 날들이 떠오르고.
몇년의 시간을 거쳐오면서 향수는 외국여행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기억체로서밖에 기능을 하지 못했다. 대중교통과 사무실을 사용해야하는 입장으로서, 내 몸에 향수를 뿌리는 것이 근처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끔 길을 걷다가 누군가의 향수 냄새를 맡게 될 때가 있다. 그 향을 맡다보면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내가 향기로서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좋은 향기로 남들에게 다가선다는 것이 나에게 특별하고 즐거운 일이 될 수는 있지만, 상대방은 그 향을 불쾌히 여기지는 않을까? 특히 과하게 향수를 뿌린 사람들을 지나칠때면, 향을 느낀다는 걸 넘어서 후각이 괴로움을 느낄 지경이 될 때도 있다. 이쯤되면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내가 먼저냐 향이 먼저냐,,
시간이 지나며 그 향수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점점 잊어가게 되었다. 향수가 유효기간이 길긴 하지만 그래도 점점 향과 빛을 잃어가는 '물'들, 물의 본성을 잃고 화려하고 예쁜 유리병에 갇혀 언제 뿌려질지 기약도 없는 채 멍하니 책상에 놓여있는 화학물질 범벅의 물들. 그래서 이 '물'들을 놓아주든, 아니면 나보다 더 자주 사용하고 좋아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연말을 맞이하여 어려운 이웃 돕기를 위한 벼룩시장에 내놓을 물건이 있는지 문의를 받았다. 기꺼이 그 향수들을 내놓기로 했다. 꽤 비싼 금액일테지만, 어차피 나도 이것을 쓰지도 않고있고, 더 잘 쓸 사람에게 돌아가고, 그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향수들은 나보다 그것을 더욱 필요로 하는사람, 평소에 그것을 갖고싶어했던 사람들에게 가서 더욱 쓰임있게 사용될 것이다.
며칠이 지나 내가 내놓은 3개의 향수가 모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에게 가서 더욱 쓰임새있게 쓰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향수가 없어도 더욱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면을 더욱 단단히 쌓아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