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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Oct 25. 2024

여기도 뉴욕

악몽

전철역에 서면 저만치 맨해튼이 보였다. 그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맨해튼에 가까워질수록 뛰는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정도였다.

전철은 코 앞에 맨해튼을 두고 땅속으로 꺼지듯이 빨려 들어가고

나는 내린다.

습한 공기를 피하려 빠른 걸음질을 한다. 모두가 나와 같은 심정인지 걸음 속도가 비슷하다.

드디어 지상으로 나온다. 이제 나만 빼고 모두가 두 배속으로 움직인다.

도시의 소음이 정신을 차리라며 등을 떠민다. 길게 숨을 내쉬고 영어학원에 들어선다.


학원으로 가는 아침에는 전철의 맨 앞칸에 올라 맨해튼을 바라본다.

영화 속 같은 장면이 꿈결 같아서 그것이 꿈이 아니라서

창에 비친 얼굴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제각각의 행색인 남들이 볼까 부끄러워진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한국 식당에서의 알바까지 끝내고 돌아올 때면 전철의 맨 뒷칸에서 맨해튼을 바라봤다. 잠들지 않는 도시를 바라보며 졸지 않으려 애썼다.

비슷비슷한 행색의 사람들이 꿈에 빠지지 않으려 눈을 부라린다.


내가 살고 있는 잭슨하잇,

세상에 걱정 따위는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곳 같다.

저마다의 이유로 미소 짓고 있는 얼굴들.

귀에 달라붙는 음악에 저절로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거리.

걷다 보면 돼지고기와 양파 또는 닭고기와 양파 볶음의 향이 끊이지 않는다.

볶음이 아니면 구이. 구이가 아니면 튀김.

코를 쳐들고 냄새의 시작점을 찾는다. 운 좋게 냄새의 근원을 찾았다면,

다음에 먹어야 할 음식 목록에 올리고 사진을 찍는다.

하루하루가 기대되는 인생이 시작됐다.

한국, 서울에서의 과거는 나쁜 꿈 정도로 기억될 것이다.


토요일 대낮이었다. 빨래방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지난주에 못한 밀린 빨래까지 한 덕분에 어깨의 보따리는 무겁기만 했다.

왜 거리에 나와있는지 모를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휘파람을 부는 벌건 얼굴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내가 사는 아파트에 가까워졌다.

아파트의 입구가 보이는 코너를 돌았다.

앞머리가 정확히 눈썹 선에 일치하는 소녀의 큰 눈을 보았다.

좁은 인도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남자를 힘겹게 지나칠 때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가 고함을 지르는 듯했지만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녀가 보폭 좁은 발로 뒷걸음치는 게 이상해 뒤를 돌아봤다.

방금 지나친 사내에게로 고개를 향했다.

털이 숭숭 난 얼굴에 충혈된 눈.

사내는 시커먼 자신의 것을 내보이고 있었다.

메마른 검은 가지 모양의 것이 축 쳐져있었다.

그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빠르게 걸을 수 없었다.

굳은 듯 제자리걸음을 하는 소녀를 잡아끌 수도 없었다.

힘겹게 소녀를 지나쳐 아파트 입구에 섰다.

어느 주머니에 열쇠를 넣었었지? 오른쪽? 아니었다.

왼쪽? 아니었다. 빨래 보따리 반대편 어깨의 핸드백을 열어야 했다.

열쇠를 찾아야 했다. 손이 떨리고 다리의 힘은 풀렸다.

뒤돌아 볼 수 없었다.

열쇠 구멍은 흐려지고 남자의 무릎에 걸려있던 때 묻은 청바지,

울긋불긋 붉은 반점이 솟아있던 허벅지만 선명해졌다.

흥겹기만 했던 거리가 가까스로 가라앉었던, 그 기억 속으로 나를 떠밀었다.

거리는 역겨움이 되었다가 이제는 공포가 되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귀를 뚫고 지나 골로 파고드는 음악.

단조로운 리듬은 머릿속에서 쉽게 떼어낼 수도 없다.

쉴 새 없이 오가며 지축을 흔드는 고가 전철.

거리 곳곳에 스며든 돼지고기 냄새, 기름 타는 냄새.

검고 크기만 한 쓰레기 봉지에서 터져 흘러나온 잿빛 액체.

눈으로도 맡을 수 있는 건물벽의 지린내

손에 잡힐 듯 보이던 맨해튼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내 집 앞을 지날 때마다 한국에서의 악몽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루라도 빨리 이 동네에서 이사를 해야 했다.

과거의 악몽에 다시 빠질 수는 없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 인터넷으로는 방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돈이 들긴 했지만 한국 부동산에 의지하기로 결정했다.

일을 하는 식당의 사장님이나 언니들에게

도움을 청할까 했지만 생각을 고쳐 먹었다.

언제 그만둘지도 모르는 일터에서 도움을 받고는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부동산 무가지에서, 그게 그 얼굴 같은 사진 속에서 한 아주머니의 전화번호를 선택했다.

요즘 집 구하기 힘들다는 예상 가능했던 대화로 시작해,

월세로 얼마를 생각하냐는 예상밖의 질문을 받았다.

주저하다가 생각했던 가격보다 높은 천 오백불을 얘기했다.

그 가격으로 베이사이드에서 집 구하기 힘들다는 대답과 함께 반지하도 괜찮죠라며 되물었다.

반지하도 반지하 나름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볕이 들어오는 반지하라며 한 번 보겠냐고 묻는다.

월세는 천 이백불

한 달 치 월세가 소개비

계약금으로 또 다른 한 달 치 월세를 내야 한단다.

보통 두 달치 월세를 계약금으로 받는데 은퇴한 집주인이 플로리다에 살고 있다는

이유를 모르겠는 설명을 덧붙였다.


전화로는 약간 퉁명스러웠던 부동산 업자가 얼굴을 마주하자 한껏 웃으며 톤 높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사진과 다른 후덕한 아주머니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밝은 미소가 반갑긴 했다.

"학생이라고 하더니 나이가 좀 들어 보이시네.." 넉살 좋게 말을 걸어왔다.

"네.. 박사 과정 밟고 있어요.. 늙은 학생이죠.."


윗 층에는 이탈리안 가족이 살고 있었고, 볕이 들어오는 반지하가 맞긴 했다. 

화장실과 거실 겸 부엌의  키 높이 창에서 들어오고 있었고 방에는 창이 없었다.

집을 둘러보다 정작 마음에 걸렸던 건 집 앞의 주차장이었다.

위층과는 입구가 분리되어 있지만 반지하는 주차장과 공간을 나눈 듯 보였다.

주차된 차와 거실은, 벽이라고 부르기에 당혹스러운 얇은 석고보드가 전부였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거실의 낡은 소파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지금 나와 있는 집이 이것밖에 없다며 속삭였다. 

결정을 할 수 없어 집에 가서 생각 좀 해보겠다며 반지하를 나섰다.

이 집 보여 줄 사람이 오후에도 있으니 되도록이면 빨리 연락 달라는 말을 끝으로 아주머니는 돌아섰다.

지금 내고 있는 월세보다 300불이 비싸고 계약금에 소개비까지 내야 하는데 마주했던 집은

한숨만 나오는 수준이었다.

당장 오늘밤에는 살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다음날 오후에 학원을 나오는 길에 부동산 아주머니의 문자를 확인했다.

'학생 전화 부탁해요' 

문자를 한 이유를 모르고 왜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며 일단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어제 집 본 사람인데 전화 주셨지요."

"학생 괜찮은 집이 나왔는데 룸메이트로 들어가는 건 어떤가? 방을 나눠 쓰는 건 아니고..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안전한 동네에..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 살아.. 조그만 아파트 빌딩이고.

침실 두 개 중 하나를 학생이 쓰면 돼.. 이런 집 베이사이드에서 찾기 힘들어."

거리의 소음 때문에, 두서없는 아주머니와 집 볼 약속을 잡아 버렸다.

아주머니가 반말조였다는 건 전화를 끊고 한참을 걷다가 생각이 났다.


전철 소리가 안 들리는 베이사이드의 방 한 칸

월세는 1000불이었다. 낯선 이와 내 방 말고 모든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

삼십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는 말이 별로 없었다.

깨끗이 정리된 부엌과 화장실을 보여줄 때도 문만 쓱 열어 주었다.

어쩜 그 여자의 시큰둥한 태도 때문에 집을 계약했을지도 모르겠다.

집을 본 그 주말에 바로 이사를 했다. 이민 가방 3개의 이삿짐 그리고

가방에 넣을 수 없었던 아이 러브 뉴욕 티셔츠를 입은 하얗고 거대한 곰인형.

지난 두 달의 뉴욕 생활 동안 이민 가방이 하나 늘었고 어울리지 않는 곰인형이 짐을 더 했다.

작은 이사를 돕는다는 곳에 연락을 했다. 업체명도 모르는 사장님은 승합차를 몰고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나타났다.

40분 정도 걸려 새 집에 도착해 아파트의 벨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소리 없는 인터폰에 귀 기울이며 벨을 길게 눌렀다. 계약하던 날 열쇠를 안 받아 놓은 걸 이제야 후회한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오는 사람이 있었고 그 틈을 이용해 한 발을 들이밀며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고맙게도 사장님이 가방을 옮겨 주셨고 가방 3개와 곰인형이 엘리베이터에 실리자마자 잘 살아요! 라며 로비 밖으로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문을 밀어서 열어야 했다. 짐을 질질 끌어내렸다. 끌어내린 짐들을 엘리베이터 옆으로 밀어 놓고 C5라고 희미하게 적혀 있는 문을 찾아 두드렸다. 불안한 마음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오늘 이사한다고 문자를 보냈었는데 사기당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문은 열렸다. 


"아파트 현관에서 여러 번 벨을 눌렀는데요.. 대답이 없으셔서.." 

"벨 고장난지 오래됐어요.. 여기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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