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습도가 높고 찬 공기 때문인지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밤이다.
차의 속도를 빠르게, 느리게 반복한다. 평소 낯설지 않은 길이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숲에 가려진 호숫가를 지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무리하게 힘이 간다.
낮에 있었던 김 사장과의 마찰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실 그 마찰이라는 것도 어떻게 시작됐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것이었다.
몇 살은 어린 후배가 말끝마다 내 얘기에 토를 달아 생긴 언쟁이었다.
나이 먹어가면서 성격도 둥글둥글 해지고 대충 넘어가는 게 좋을 텐데 김 사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할 말
다 하는 모습이 밉상 맞다.
내가 해야 했을 말,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의 충돌하며 운전에 집중이 안 됐다.
안개 때문인지 몽환적 느낌마저 드는 밤이다. 빨리 차를 몰고 집으로 가 누울 생각뿐이다.
롱 아일랜드 대학을 지나 낮은 고개를 오르고 내리막길로 막 접어들 때였다.
눈앞에 갑자기 너구리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가족인가?
큰 놈 한 마리에 작은놈 둘. 너무 갑작스러워 생각은 하얗게 사라져 버렸다.
너구리 가족은 놀랐는지 가던 길을 숫제 멈추어 버렸다.
그중 큰 녀석은 헤드라이트 뒤의 내 눈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높지 않은 언덕이었는데도 내리막길 탄력을 받았는지 가속이 붙어 있었다. 그 찰나에 너구리들과의
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중앙선을 넘어 너구리를 피해 볼 양으로 왼쪽으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내 눈에 밟힌 건 또 한 마리의 너구리.
키 작은 가로수 밑에서 나를 보고 있다. 그 야광 같은 눈과 마주친 나의 눈.
나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너구리를 앞서가려고 가속 페달을 더 깊이 밟았다.
홱 하고 지나치며 너구리들을 피했다고 생각했을 때, 오른쪽 뒷바퀴에서 덜커덩 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밟았구나! 느낌이 들고. 순간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덜커덩 소리는 연이어 들렸다. 나는 열려있던 창문을 모두 닫았다.
좌회전을 하기 위해 신호등 앞에 섰을 무렵 덜컥하며 소리는 멈췄다.
혹시 너구리 사체가 뒷바퀴에 낀 것은 아닐까?
신호등이 좌회전 신호로 바뀌는 동시에 차의 액셀을 굳게 밟았다. 차에 속력을 더했다.
쫓아오는 너구리를 떼어 내려는 심정이었다.
공포심은 더욱더 커져 목덜미에 너구리의 입김이 닿는 듯했다.
그리 멀지 않았던 집에 도착했다. 주차를 시켰지만 바로 차에서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이 먹고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 후에야 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다.
차 뒤쪽을 확인해 보려는 마음은 아예 없었다.
도망치듯 아파트 현관으로 뛰어들었다.
집안은 부엌의 비상등만 켜져 있고 불은 모두 꺼져있다. 마누라야 텔레비전 보다가 잠들었을
테고 아들놈의 방에서도 불빛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평상시 같으면 방안을 확인해 봤겠지만,
오늘은 먼저 욕실로 향했다. 샤워하는데 피투성이 너구리가 계속 연상됐다. 나는 너구리의 피를
씻어 내기라도 하듯 정성 들여 비누칠을 했다. 평소에 쓰지도 않던 때수건으로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살갗이 빨갛게 달아 오른 후에야 수건질을 멈췄다. 더운물로 오래도록 몸을 헹궜다. 살갗의
따가움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있네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등이 보이는 마누라 옆으로 조용히 누웠다. 아들 녀석의 방문은 끝내 열어보지 못했다. 내 몸에
부정한 게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런 게 로드 킬이구나. 그전까지 가장 큰 짐승을 죽여 본 것은 병아리뿐이었다. 그것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촌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에서 키우던 조금은 컸던 병아리를
옥상에서 던졌다. 나는 그 병아리가 날 수 있을 줄 알고 던졌다. 그렇게 땅으로 내동댕이쳐질 줄은
정말 몰랐다. 사촌 누나가 울고불고 난리가 나고 나를 애써 외면하던 외숙모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운전을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내가 죽인
너구리는 어떤 놈이었을까? 바퀴가 덜컥거렸을 때의 충격으로 봐서 새끼는 아니었던 거 같고
어미? 아비?..., 길 건너의 너구리는 분명 큰 놈이었는데...., 중요한 건 너구리 네 식구 중 한 마리를
내가 죽였고 단란했었을 가족을 파탄 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죽인 것이 아비였다면? 졸지에
가장을 잃은 세 모자는 어떡하나? 이런 일이 우리 가족에 닥친다면 어떡하나?
걱정은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사람을 쫓고 있다. 언제부터 이 자를 쫓고 있었을까? 쫓는 자의 숨결을 느낀 듯, 앞선
이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나의 걸음도 빨라진다. 숨이 턱에 차올라 숨을 멈추고 걸음을 빨리한다.
걸음은 달리기가 된다. 참았던 숨을 몰아쉰다. 거리는 좁혀졌고 그의 뒤통수, 어깨, 등이 선명하게
보인다. 짧은 머리, 갈색의 가죽 재킷.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다. 달리기를 멈추고 걷기
시작한다. 걸음의 속도는 쫓기는 이에게 의존한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를 향해 손을 내
뻗는다. 손이 닿을만하면 다시 벌어지는 거리. 벌어지는 거리를 좁혀 보려 걸음을 재촉한다.
그자의 걸음도 빨라진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이때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앞서 가던 사람이 저만치 가고 있다. 나는 뛰기 시작한다. 뒤에 있던
인기척이 가까워진다. 귓등으로 서늘한 기운이 전해진다. 돌아볼 용기는 없고 달리기에 속력을
낸다. 쫓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쫓고 있었던가? 쫓기고 있었던가?
내 뒤의 인기척도 더는 없다. 숨이 차올라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 뛰는 가슴이 모든 소리를 집어
삼킨다. 멈춰서 허리 숙여 숨을 몰아쉰다.
허리를 숙인 채로 뒤를 돌아본다. 순간 노란 불덩이가 내 오른쪽 눈을 퍽하고 때린다.
너무 강한 충격에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것 같다. 고통조차 느끼기 전의 그 찰나.
피범벅 된 나의 몸을 내려본다. 고통을 눈으로 느낀다. 크게 내지른 비명은 나에게조차 들리지 않는다.
내내 뒤척이게 만들던 밤이 이렇게 물러났다.
눈을 뜨니 아침 아홉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마누라는 당연히 나가고 없다. 나는 대충 세면을 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아 냉장고 문을 연다. 입맛이 없는데 먹을 것이 눈에
들어 올 리가 없다. 멍하니 허리 숙여 냉장고 안을 들여 보다가 우유를 집어 들었다. 우유를 잔에
따르고 단숨에 마신다. 너구리 새끼들이 젖은 뗐으려나?라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서 있는 차를 보니, 어제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나는 애써 오른쪽 뒷바퀴를
외면한 채 운전석에 올랐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세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너구리 사체가
뒷바퀴에 끼어 있을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든다. 혹시 붙어 있을지 모를 사체를 떼어 내려고 차를 과격하게
몰았다. 과속방지턱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저만치의 세차장 간판이 반가웠다. 웅성거리 듯 나와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세차장에 도착했다. 뒷바퀴에 끼어있을 피투성이 너구리 때문에 욕이나 먹지 않을까
조바심이 생겼다. 눈치를 보며 차에서 내리는데, 조금 전에 있던 직원들이 안 보였다.
사무실 쪽으로 가 안을 살펴보는데 한 직원이 나오며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본다. 나는 긴말 안 하고 카 와쉬 스페셜이라고 했다. 나를 쳐다보던 직원이 내가 들어온 진입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뭐지? 나는 밖을 쳐다보고 다시 직원을 쳐다본다. 직원이 다시 밖을 가리킨다. 나는 순간 화가 나, 왓! 하며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제법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린 비일까? 나와 마주친 직원의 눈은 무심함에서
비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창피함으로, 내 차는 비로 젖고 있었다. 운전하며 내가 와이퍼를
작동시켰었나? 언제? 갑자기 헛것과 실체가 구분이 안 된다. 나는 상관없으니 세차를 해달라고
말했다. 비웃음에서 모멸감의 눈으로 바뀐 직원은 나 하나 때문에 세차장을 오픈할 수도 없고 다른
직원은 모두 퇴근해서 세차를 할 수 없단다. 비가 그친 후 다시 오란다.
저절로 숙여진 고개로 차를 돌려 세차장을 빠져나왔다.
조금이라도 물이 고여있는 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제발 좀 씻겨 나가라고 입은 중얼거렸다.
고인 물을 찾던 세차장에서 네일 살롱까지의 거리는 짧게만 느껴졌다.
네일 살롱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뒷바퀴 쪽을 외면하며 내렸다.
도어의 딸랑 소리와 함께 네일 살롱으로 들어섰다.
'꼬모 에스따!" 언제나 제일 먼저 반겨주는 스페니쉬 엘리자베스.
"꼬모 에스따!" 나도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왼쪽으로 늘어 선 페디큐어 체어와 오른쪽으로 늘어선 네일 테이블을 지나 마누라에게 다가간다.
몇 명의 손님이 페디큐어 체어에 앉아 있었는지, 몇 명의 손님이 네일 서비스를 받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관심을 회피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마누라가 읽고 있던 신문으로 고개를 감춘다. 오늘 아침이 특별한 건 아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 연애 때부터 결혼한 지 이 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애교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여자. 슬그머니 마누라가 앉아있는 카운터로 가서 캐쉬어의 서랍을 연다. 은행에 입금할
수표를 챙기고 공과금 낼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마누라 눈치를 살피고 다녀올 거라며 가게를
나선다. 처음 네일 살롱을 운영할 때부터 이런 관계는 아니었다. 필요한 물품이나 기술자를 구하는
건 내가 할 일이었고 마누라도 내 의견을 존중했다. 하지만 네일 살롱 일이라는 게 여자 직원에
여자 손님들, 내가 설 자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좁아져 있었다. 이상한 일은 나에게 셔터문이
점점 무겁게 느껴질수록 마누라의 힘은 점점 세졌다. 청소 일도 눈치 빠른 엘리자베스가 맡게
되니 내가 가게에 붙어 있을 이유는 점점 사라져 갔다. 나의 입지가 작아져도 미련은 없었다. 나
자신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조정 가능한 것이 점차로 소멸되어 갔다. 드라마
보다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 하는 것은 애교에 가깝다. 미처 털리지 않는 소변 때문에 노란색으로
팬티를 물들인다. 조정됐었고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조정 안 됐다. 마누라 눈치를 볼
즈음, 모든 팬티는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랍에 꽉 차 있는 검정 팬티를 보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쯤 나는 아예 조정할 수 없는 것에 집중을 하기로 했다. 정치인 걱정,
연예인 걱정, 지구 온난화나 세계평화 걱정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기로 했다.
다행이다 싶다. 지금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게 문 닫는 일을 하고 있다.
굵었던 빗줄기가 와이퍼를 작동시켜야 할지 말지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바뀌었다. 엷은 비. 괜히
시야에 방해만 된다. 쇼핑몰 코너를 돌아 교차로를 지날 때였다. 신호등 색깔은 노란색. 속력을
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감시 카메라 무서워 운전도 편히 못 한다. 졸보가 되어버린 나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다. 횡단보도 왼쪽에서 흑인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한쪽 다리를 절며
걸어온다. 발보다 훨씬 커 보이는 운동화를 신고 있다. 구멍 사이로 엄지발가락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회색인 것으로 추측되는 낡은 바지의 한쪽은 무릎에 걸려있고 다른 한쪽은 기장이
길어 땅에 끌린다. 늦여름 날씨 아랑곳하지 않는지 청색의 오리털 조끼를 입었다. 조끼의 생채기로
오리털이 삐죽삐죽 보인다. 내 쪽으로 오는 게 나에게 적선을 원하는 게 틀림없다. 그자의 손은 때
끼가 가득하고 손등은 나무옹이를 닮아있다. 모양새가 잔돈을 건네주고 싶어도 건네주기 힘든
상황이다. 내 손을 잡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는 시선을 빨간색 신호등에 고정한 채 공기 마실 만큼
열려있던 차창을 슬며시 닫았다. 잠겨있을 도어록 버튼을 확인 차 눌러본다. 버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져 놀란다. 이제는 됐어라는 만족감. 신호등을 보다가 계기판으로 시선을 낮추며 그자의
눈치를 살핀다. 그자가 뭐라고 한다. 시선만 돌려 쳐다보니 그 자가 니하오?라고 한다. 그자의
얼굴을 슬쩍 보고 다시 신호등을 쳐다본다. 여기 신호등은 왜 이리 안 바뀌지 하는 원망이 든다.
차 안의 미러로 뒤쪽을 보니 내 뒤로는 차 한 대 없다. 그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뻑킹 차이니즈라는 고함이 들린다. 가운뎃손가락 마저 들이댄다. 난데없이 욕을 먹었지만
나는 중국 사람 아니니까 괜찮아 위로를 한다. 내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갑자기 퉤
소리와 함께 내 창에 무늬를 새긴 그 자의 침 덩어리. 그자는 더는 절룩거리지 않으며 내 오른쪽으로
지나쳐 간다. 그렇지 않아도 뒷바퀴에 끼어있을 너구리가 신경 쓰이는데 옆 창에는 침 뭉치가
새겨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까 창문을 닫기 잘했지 하는 마음에 안도감이
밀려온다. 다행이다 싶다. 언제 왔는지, 뒤 차가 경적을 울린다. 나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창문의 침 덩어리는 바람에 밀리며 나비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변해간다. 안개비에 반사되어
잿빛이었던 침이 무지갯빛으로 보인다. 차를 달리다 보니 나비 무늬는 퍼져가고…, 어이없는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은행으로 향하던 계획을 미루고 근처 한국 빵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점심시간이 넘은 지금까지 커피 한 잔을 못했다. 커피를 떠올리니 커피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한국
빵집, 한국말로 인사하고, 한국말로 주문을 했다. "뜨리 달러 화이브 센츠"여자가 어떤 감정도 없이
영어로 대답한다. 눈도 마주치지 않는 여자에게서 커피를 전달받았다.
문득 화가 치밀다가 내 자식 교육이나 잘 시키자고 다짐을 해본다. 하늘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커피 한 번 쳐다보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커피 한 번 쳐다보고…, 잔뜩 흐린 하늘이 커피와 닮아 보인다. 흐린 하늘이라 하늘을 볼 수 있다. 평소 같으면 눈이 시려 하늘로 눈길조차 못 주었을 거다. 갑자기 코 끝이 맵다. 콧물이 나오고 눈앞이 먹먹해진다. 표정 없을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 한다. 남이 볼까…, 냅킨을 코로 가져가는 척하며 눈물을 찍어낸다.
봄날이었다. 꽃샘추위도 물러가고 습기 없는 공기가 허파까지 닿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이불
말리기 좋은 날. 이불 뭉치에 눈앞이 가려 더듬더듬 현관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던 거실의 전화벨 소리. 들고 있던 이불 때문에 뒤뚱거리며 전화기로 다가간다. 이미 끊어진 벨
소리. 주머니의 휴대폰이 진동한다. 휴대폰이 몸 전체를 뒤흔든다. 번호를 보니 한국에서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나쁜 소식임을 알았다. 아버지 방금 돌아가셨어!라는 동생의
건조한 말. 올 것이 온 거 같았지만 그 어떤 준비도 없었던 쉰 넘은 장남. 그제야 들고 있던 이불을
소파로 던져 버린다. "내가 다시 전화할게"조심히 전화를 끊는다. 소파 밑으로 주저앉아 한숨만 쉬어
됐던 정오 무렵이었다. 아버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혼잣말이었는데도
무척 생소했다. 이럴 때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 거지?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려 보려 했다.
아이였던 내 기억만 떠올랐다. 그 아이가 나였나? 그 아이가 지금 나인가? 부모와 떨어져 지낸
중년의 나는, 아니 그 아이는 남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모든 상황이 내 일 같지 않았다.
한국행 비행기 표는 얼마나 할까? 급하게 구매를 하면 할인이 안될 텐데…, 입맛은 없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해라며 냉장고로 향했다. 그렇게 그날 나는 끼니를 걱정하고 있었다.
빵집 창밖은 신호등에 맞춰 규율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치를 보듯 서 있는 차들, 바쁜 척 서
있는 사람들, 서성이는 비둘기들. 하늘은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고 있었다. 거뭇한 눈 주위,
유난히 짧은 팔다리 너구리가 연상되다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기억 속 아버지 얼굴은
미국 올 때 헤어졌던 그때 나이에 멈춰있다. 지금의 나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이다. 나는 국민학교
입학 무렵까지 아버지를 아범이라 불렀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아버지와의 첫 만남.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검은 얼굴에 더 검었던 눈 주위를 잊을 수 없다. 그 남자를
가리키며 동현아! 니 아범이다. 하셨던 할머니. 나는 처음 보는 그를 아범이라 불렀다.
월남에 갔던 아버지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아버지와의 첫 대면을 기억하는 아이가
되었다. 중학교 담임에게 종아리를 맞고 온 날, 안티푸라민을 발라주던 아버지의 짧은 손가락,
낮술에 취해 들어온 아들에게 박카스를 건 넷 던 아버지. 미국에서 아빠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칼국수를 끓여 당신 자식과 그의 자식을 먹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오늘
보지도 못했던 해가 기울어간다. 배고픔은 안 느껴졌다. 하지만 먹어야 한다. 하늘 한 번 보고, 식은
커피 한 번 보고…, 결심을 해본다.
집으로 돌아가 밥부터 먹어야겠다.
냉장고에서 콩나물국 냄비를 꺼낸다. 대충 데워 밥을 말아 넣는다. 국이 있으니 반찬은
김치로 족하다. 그런데 김치가 시었다. 신 김치는 딱 질색인데..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냥
먹는다. 온종일 인내심을 시험하는 하루 아니 인내심을 시험하는 나의 인생. 콩나물과 김치와 밥을
씹으며 결심을 되새긴다.
마누라가 영업 끝낼 시간에 맞춰 가게로 갔다. 뒷바퀴 쪽을 외면하며 차에서 내린다. 도어의 딸랑
소리와 함께 네일 살롱으로 들어섰다. 꼬모 에스따! 이번에도 엘리자베스. 나는 눈인사를 건넨다.
가게에는 손님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나가야 가게 문을 닫을 수 있다. 오늘 매상이
괜찮았는지 마누라가 방글방글 웃고 있다. 나를 보고 웃는 건 아니다. 마누라에게 가게 문 닫고 잠깐
들를 곳이 있다고 말한다. 밖에서 쓸데없는 짓거리하지 말라는 마누라의 잔소리. 잔소리에 리듬이
있다. 매상이 높은 게 틀림없다. 기다리던 손님이 나가고 전등 스위치를 하나씩 내리며 뒷마무리를 한다. 마누라와 종업원들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나는 자물통을 들고 따라나선다. 꼬챙이를 들어 셔터문을 내린다. 내가 허리 숙여 자물통을 잠그고 마누라가 확인을 한다. 곁눈질로 마누라를 봤다. 표면 벗겨진 낡은 줄의 갈색 가방이 마누라 어깨에 걸려있다. 벌어진 마누라의 어깨에 믿음이 간다. 다행이다 싶다. 영미야 사랑해! 한 손들어 손짓하며 돌아섰다. 마누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돌아볼 용기가 없다.
맑은 밤이다. 밤안개가 깔려있던 어젯밤이 헛것처럼 느껴졌다. 길 가장자리로 차를 세웠다.
길을 건넌 너구리가 있던 자리쯤이었다. 멀찌감치 주유소의 불빛이 보인다.
띄엄띄엄 규칙적으로 서 있는 가로등은 밝지 않다. 고개를 너무 높이 쳐든 듯 보인다. 긴장
탓인지 귓가가 간지러웠다.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차에서 내렸다. 풀냄새가 난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끄니 바깥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전화의 라이트 기능을 보려고 다시 차에 오른다.
전화기에서 빛이 나온다. 차에서 내린다. 전화기 라잇은 생각보다 밝았다. 차를 등 뒤로하고 동쪽을
보고, 서쪽을 봤다. 지나다니는 차는 없다. 트렁크를 열고 목장갑을 찾아 낀다. 신문뭉치를 꺼내고
비닐봉지도 챙긴다. 그때서야 부삽이라도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을 한다. 종일 외면했던 오른쪽
뒷바퀴로 간다. 바퀴는 깨끗했다.
전화 라이트를 가까이하며 타이어의 홈까지 살핀다. 핏자국이 없다. 오른쪽 바퀴가 아니었나?
왼쪽 바퀴로 가서 빛을 들이댄다. 마침 빠르게 스쳐가는 차가 위협적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고 귀를 꼬집는다.
어떤 이물질도 눈에 띄지 않았다. 타이어 바꿀 때가 됐네!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과감하게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타이어의 온기가 코로 전해진다. 알지도 못하는 너구리의 체취는 없다.
천천히 일어선다. 다시 한번 동쪽을 보고 서쪽을 본다. 중앙선까지 냅다 뛴다.
한정된 시야를 전화기 빛으로 넓혀 보려 한다. 너구리 사체를 찾는다. 사체의 조각이라도 찾아보려 한다.
하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차 세워진 곳으로 후딱 뛰어온다. 여기가 아니었나? 차에 올라 기억을 되새긴다. 그러니까 학교를
지나치고 고개를 넘어서 막 내리막길로 내디딜 때였는데…, 차에서 내려 고개 숙여 길을 살피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사체 아니 사체 조각이라도 찾아서 곱게 묻어줘야겠다는 계획이 쉽지 않음을
예상한다. 오늘 몇 번이나 결심했는데…,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 세운 계획이었는데 오밤중에
헛짓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핏자국이라도 찾으면 그 자리에서 기도나 해야겠다는
것으로 마음 정리를 했다. 이 근처가 틀림없는데 왜 안 보일까? 익숙해진 전화기 빛으로 차가운
아스팔트를 비춘다. 낮에 왔어야 하는 건데 라는 후회가 밀려온다. 길 건너편을 한 번만 더 보고
돌아가야겠다. 길 건너로 후딱 내딛듯이 뛰었다. 그때 눈앞이 확 밝아진다. 거대한 불빛에 몸은
얼어붙었다. 동공이 빠르게 축소된다. 트럭의 거대한 화통 소리. 굉음. 섬광이 머릿속을 뒤흔든다.
어깨가 움츠러든다. 전화기를 떨어뜨리고 손을 귀로 가져간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 찰나 트럭은
내 옆을 홱 지나친다. 거의 의식을 잃을 뻔했다. 불 밝은 전화기를 주워든다. 전화가 깨졌고 안
깨졌고는 안중에도 없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질질 끌며
길가로 되돌아온다. 길 가장자리에 다다라서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다. 물이 고여 있었는지 엉덩이에
냉기가 전해진다. 풀린 다리로 일어서지 못한다.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하늘을 쳐다본다.
비죽비죽 별이 보인다. 별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한다.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엉거주춤 일어선다. 젖은 바지를 쥐어짜본다. 방금 비명횡사할 뻔한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길 건너에 너구리가 보인다. 눈물에 가려진 시야를 문질러 닦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셋, 넷…, 네
마리다. 눈을 문지르며 다시 센다. 큰 놈 두 마리, 작은놈 두 마리. 웃음이 났다. 웃음, 눈물…, 콧물이
흘러내린다. 살아있어 고맙다. 너굴아….
몇 시나 됐을까? 전화기를 꺼내 본다. 전화기는 멀쩡했다. 고맙다를 한 번 되풀이한다. 풀벌레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 같다. 낮에 본 거지 양반에게 인사라도 건네봐야겠다. 진흙이
묻고 질퍽하게 젖어있는 바지를 털어본다. 그나저나 영미에게는 뭐라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