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깨달음
하나! 둘! 셋! 찍습니다. 뷰티풀! 예, 잠시만요. 그대로 계시고요. 다음은 부모님 모시고
올게요. 그리고 형제 가족 분들 미리 준비해 주세요. 그렇지요. 예 그러고 계시면 돼요. 아주
자연스러워요. 신부님 오늘 너무 예쁘시다. 자 그대로 한 번 더! 활짝 웃으면서, 아이고 신랑 분
너무 경직됐어요. 어깨에 힘 빼실게요. 오케이, 좋습니다. 카메라 보세요! 찍습니다!
언제나 입에서 나오는 같은 말. 영화라면 너무도 지루할 시나리오. 그것이 나의 일상이고, 남의 행복을
찍으며 살아간다. 나는 카메라 뷰 파인더를 통해 사물을 본다.
신부를 가깝게도, 멀리도 볼 수 있다. 신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신부의 눈매를 보며 상상을 시작한다.
이십여 년 혹은 고작 삼십여 년 남짓한 그들의 인생.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주름은 많은 것을 얘기해 준다.
촘촘한 눈가의 주름은 웃을 일 많은 집안의 분위기를 말한다. 많지 않은 주름에 폭이 넓다면 웃을 일 별로 없고 신중할 수 있다. 눈썹 끝 처진 주름은 좋 건 싫 건 사연 많을 가능성이 크고, 반대로 올라간 주름 끝은 이야깃거리 없는 심심한 분위기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눈가 주름을 관찰하는 게 흥미롭지만 관찰은 쉽지 않다. 화장으로 주름을 덮어 버리기
전에만 허락되는 짧은 시간. 어울리지 않는 젊은 여자의
주름에 집중하며 과거를 상상하는 건 나의 비밀스러운 기쁨이다. 기쁨을 들키지 않으려 카메라를 좀 더 얼굴에 밀착시킨다. 카메라 뒤로 숨는 건 얼굴만이 아니다. 마음도 숨길 수 있다.
카메라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누구나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돌아보니 신부의 이모다.
"여기요! 사진사 양반 너무 신부만 찍지 마시고 이쪽 들러리들도 좀 찍어 주세요! 들러리들은 그냥
배경인가!"
주변에 있던 친지들이 크게 웃는다. 이 집안의 코미디언은 이 여자다.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다.
"예, 그럼요. 들러리가 있어야 신부가 사는 날이죠" 대충 자동으로 맞춰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미국의 결혼 사진사는 결혼식이 있는 날이면 온종일 장소를
이동해 가며 사진을 찍는다. 아침부터 신부의 화장, 머리 손질부터 찍기 시작해 식장으로 이동해
혼례를 찍고, 식이 끝난 후에는 만찬 겸 연회 행사까지 찍어야 한다. 신랑, 신부는 물론 하객,
가족, 일하는 사람 모두가 지칠 때쯤 그들이 말하는 인륜지대사가 끝난다.
그녀를 만난 건 중국 남자와 결혼하는 한국 여자의 결혼식이었다. 중국계 미국인인 신랑은
건장한 체격에 누가 말을 걸어도 호탕한 웃음으로 시작하는 유쾌한 남자였다. 그에 비해 한국어
악센트가 심하고 또박또박 영어를 구사하는 신부는 필요할 때만 입을 여는 여자로 보였다.
백육십 센티미터가 조금 넘을 키에, 선이 뚜렷한 콧날을 가진 미인이었다. 눈가의 주름 폭은 넓었다.
어떤 연유의 이민인지는 몰라도 부모 말고는 별다른 친인척도 없었다.
먼 친척이라며 앞니 빠진 사내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전부였다. 신부가 드레스를 안 입고 있었다면,
신부가 짙은 화장을 안 하고 있었다면 장례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신부 측 분위기였다.
사진사가 분위기 메이커까지 하며 촬영을 해야 하는 힘든 결혼식이었다. 미소 없는 사진의 책임은 나중에
모두 사진사의 몫이 되기 마련이다.
그녀는 세 명의 들러리 중, 한 명으로 신부의 옆에서 유난히 신부를
챙기고 있었다. 자주 삐뚤어지는 귀걸이를 고쳐주고, 사진 찍을 때마다 펼쳐줘야 할 드레스를
허리 굽혀 펴 주었다. 곱상한 얼굴과 상반되는 이국적 피부 빛, 쌍꺼풀 없이 큰 눈, 가늘고 마디가
모나지 않은 손가락, 궂은일 마다하지 않을 훈련된 어깨선. 굳어있는 신부의 아버지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살갑게 대하는 성격이었다. 이마의 주름을 모아 한참 인상을 쓰고 있던 신부의 아버지도
그녀에게는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시선을 끌었다. 신부의 어머니는 옆에서
태풍이 불어도 무심할 것 같은 얼굴로 내내 신부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닮은 모녀의 눈매가
기억에 남는다. 어느덧 연회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신랑, 신부가 중국 전통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신부가 입은 치파오는 한 여름 장미 같은 탐스러운 붉은색이었다. 금색으로 수놓은 공작새 문양이
가슴에서 시작해 허리 부분까지 화려하게 펼쳐져 치마의 끝자락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의상이었다. 하객들은 탄성을 지었고 짓궂은 신랑의 친구들은 휘파람을 불어댔다. 하지만 나는
누가 봐도 들러리 용, 치파오를 입고 있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초록색에 가까운 연두색에 이름 모를 꽃이 새겨진 치파오. 뚜렷하게 몸매를 보여주는 얇은 겉감. 긴 목에서 이어지는 가슴선,
무릎 선 바로 위까지 터져 있는 치파오의 틈새로 보였다 말았다 하는 무릎. 나는 그날 그녀의 사진을 신부보다 더 많이 찍었다. 술에 취한 신랑이 나의 어깨를 싸잡아 당기며 마오타이를 권했다. 평소라면 정중히 거절했을 잔을 받아 깔끔히 들이켰다. 어딘가에서 그녀가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중국 술 특유의 향, 나에게는 양파 볶음 같이 느껴지는 냄새가 목젖을 달궜다. 신랑과 신랑 들러리들이 하오! 하오! 를 외친다. 나는 두 잔을 더 받아 마셨다. 그리고 없던 용기가 생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혹시 남자친구 같은 거 키우시나요?" 웃어도 작아지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망설임 없이 입을 뗐다.
"아직 입양 전이에요."
아직이라는 말에 바로 전화번호를 물었다. 급히 바텐더에게 펜을 빌리고, 그녀는 내 손바닥 위에
전화번호를 적는다. 그녀의 이름은 연수였다.
오늘 신부는 유난히 눈을 많이 깜박인다. 너무 길게 붙인 속눈썹 때문인 거 같은데 눈감은
사진이 너무 많아 촬영에 애로사항이 많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매 번 셔터 누르는
타이밍을 신부에게 알려야 했다. 이렇게 사진을 찍고 나면 나중에 컴플레인을 들을 확률이
높아진다. 생긴 대로 나온 사진을 보고 자연스럽지 않다고 할 것이다. 눈 감은 사진이 많으니
당연히 많이 찍을 수밖에 없고 노동의 강도는 높아진다. 그나마 디지털카메라로 찍고 있으니
재차 확인을 하며 찍고 있다.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면 현상 전까지 눈을 감고 뜨는 건 둘째치고
사진의 초점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조차도 몰랐을 거다. 지금은 그때그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고, 그 상황이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몰랐다면 더 나을 수 있는 상황을 그리며 마음속으로
읊조린다. 눈을 뜨세요. 눈을.
여자가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치장 한 날. 그 아름다움을 만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날.
하지만 모든 신부가 결혼식 날 아름다울 수는 없고, 그 사실은 나와 별 상관이 없다.
과체중의 신부를 만나는 날은 흔하다.
"신부님, 잠깐 앉아 보시겠어요! 그렇지요.... 부케를 얼굴 가까이 대고 눈으로만 카메라를 보실
게요!"
"저는 앉으면 뚱뚱해 보이는데.." 뚱뚱한 신부가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신부는
앉으나 서나 뚱뚱하다. 오늘의 목표는 어떻게든 신부의 매력을 찾아내는 거다. 끌리는 매력이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신부를 창가로 데리고 가 커튼으로 몸의 반쯤을 가려 보기도 하고 화장대
거울의 굴절을 이용해 몸을 작아 보이게도 해본다. 나는 이 여자에게 끌려야 한다. 끌림을 찾아야
만족할 만한 사진을 건질 수 있다. 신부들은 본인처럼 나온 사진을 싫어한다.
고객에게 불만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프로임을 증명해야 한다. 사진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베이사이드 기차역 옆의 카페 키노. 영화 관련 소품으로 실내가 장식됐고, 무심한
여사장이 무심히 커피를 내려 주는 곳. 그녀와 내가 자주 찾던 데이트 장소였다.
나는 항상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있었다.
어느덧 지정석이 된, 창가 자리에 앉아 곧 나타 날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미소 짓고, 손을 흔들고, 힘차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맞이하는 날들이었다. 바로 옆 그녀가 금방이라도 그리워질 것 같아
흘깃거리며 웃음 지었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덧니가 살짝 보이던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을 되새겼다. 사람을 알아가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만난 지도 삼 개월이 다 되어가네, 그때 중국 남자랑 결혼한 친구는 잘 살고 있대?
이름이 뭐였더라? 자주 연락해? 일주일 만에 만난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긴장을 풀 때였다..
"잘 살고 있겠지 뭐.." 시큰둥한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다.
뒤로 이어질 말이 궁금해졌다.
"오빠 몰랐었나? 나 그 여자 몰라.. 그날 하객 대행 서비스 연락받고 나가서 처음 본 사람이야.."
그녀가 뒤로 허리까지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웃음을 못 참겠는지 내 허벅지를 때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나 같이 웃을 수는 없었다.
그녀와의 결혼 준비는 순조로웠다. 우리 둘은 그 방면에 나름 전문가였다. 가족이 모두
한국에 있던 그녀 쪽에서는 보스턴에 살던 사촌 언니네 식구들이 참석했고, 내 쪽에서는
아버지와 여동생네 식구 그리고 몇몇 지인들이 와 줬다. 나 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괜히 삼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꺼내며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그녀의 지인들로는 하객 대행
서비스에서 알게 된 사람들도 참석을 했는데 몇 사람은 낯익어 보이기도 했다. 일 년에 몇 번이나
결혼식 참석을 하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러야 했다. 말하기도 쉽고 치르기도 쉬웠던 말
그대로 작은 결혼식이었다. 내 일정 때문에 신혼여행을 미루었지만 그녀는 이해해 주었다.
"결혼 시즌이 끝나고 신혼여행 가면 사람도 없고 더 좋지"대수롭지 않은 듯 얘기하는 그녀가 고마웠다.
일조량 많은 남향집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신혼집. 방 한 칸짜리 원 베드룸이었지만 그녀는
그녀의 색을 입히려 애썼다. 하늘색 벽과 연두색의 천장. 은색 메탈 재질의 액자들. 표현주의
화가들의 그림들. 하얀색의 침대, 책꽂이, 책상, 화장대. 그녀가 그녀의 취향을 발산할
때, 의견 충돌은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내가 편하다는 것을 나는 어머니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못을 박건 빼건 페인트 색을 바꾸건 말건 그녀는 혼자 서 해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는 나에게 도움을 원했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오더를 받아 물건을
보내주는 구매대행업을 하고 있었다. 얼굴 팔렸다며 하객 대행업은 그만두었다. 별 관심이 없어
얼마를 버는지는 몰랐지만, 옷장 속 그녀의 옷은 늘지 않았고 명품 가방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난데없이 이번주 목요일 여섯 시에 같이 갈 데 있어. 그러고는 나를 근사한 식당으로
데려가곤 했다. 큰 접시에 앙증맞은 먹을 것이 나올 때마다 웨이터가 다가와 접시 위 뭔가에 대해
설명을 하는 식당. 이 웨이터들은 직접 음식을 옮기지도 않았다. 입만 나불거리는
웨이터들에게 나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런 식당에 가게 되면 나는 술을 많이 마셨다. 그녀는
와인을 골라 주기만 했고 나는 마시기만 했다. 내가 술기운에 남들 행동이나 생긴 걸 갖고 놀려
대면 그녀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도 웃어 주었다. 그때는 몰랐다. 낯익은 그 웃음이 나를 닮아
있었다는 것을. 시간은 그렇게 무심히 흘렀고 예정되어 있던 신혼여행은 그녀가 바빠지며 또
다른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녀와의 공간에 익숙해질 무렵, 구매대행으로 보낼 짐들이 거실과 방을 채워 나갔다. 어느 때는
화장실 입구까지도 박스가 가로막고 있었다. 눅눅함이 묻어나는 골판지 박스의 냄새. 위태롭게
천장 높이까지 쌓이는 박스들. 나는 벽과 박스들 사이에서 균형이 필요했다. 그녀는
고마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어갔다.
소중한 것, 필요한 것을 지나쳐 버리는 날들. 창가로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짙게
만들었다. 어느덧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익숙해져 갔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흥겹지 않아도 흥겨우려고 노력한다. 언제나 분위기 살리는
이모나 고모, 작은 아버지, 친구들이 있다. 나는 긴장해 있는 신부의 눈치만 살피면 된다.
그러나 오늘은 나의 관심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쏠렸다. 차에 두고 온 여유분의 배터리를 가지러
주차장으로 갔을 때, 신부의 아버지는 밴 트럭 뒤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포마드를
발라 반듯이 정리된 머리는 연신 하늘을 향하고 땅을 향했다. 긴 호흡으로 내뿜는
담배연기는 멀리 가지 못하고 가슴에 꽂힌 하얀색 장미를 질식시켰다. 그의 작은 눈이 많은
얘기를 하려는 듯 보였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조차 끝까지 안 웃어 밉상이었던 신부 아버지.
신부 아버지가 결혼을 심하게 반대했었단다. 하지만 그는 지금 결혼식에 와 있다.
그리고 같은 날, 지금 신랑이 느꼈을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에게 부정당하는 심정은
어땠을까? 부정당했던 기억의 유효기간은? 수치심의 한계는? 상처받은 자존감의 치유기간은?
상처의 깊이는 새겨진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주차장의 신부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상처는 누가 입은 것일까?
첫눈에 사랑이 시작될 수 있듯이, 단 한 번에 사랑이 끝날수도 있을까? 다른
이유 없이. 타인의 먹는 모습이 처먹는 걸로 보이면 미움의 시작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불만은
나의 먹는 모습에서 시작됐다. 나는 인식 못하는 오래된 버릇들. 밥을 빤단다. 음식을
씹으며 입으로 숨을 쉰 단다. 젓가락질하는 내 검지가 거슬린단다. 그녀의 말마디는 모두가
사실이었다. 낯 선 익숙함이 내 목을 죄여왔다. 어머니의 지독함. 불편한 상대의 입을 먼저 열게
만드는 인내심. 시작된 싸움에서는 상대의 숨통을 조이던 집요함. 그 빌어 먹을 지독함.
그녀와의 싸움에 나는 감정적이었고 그녀는 이성적이었다.
부드럽게 말해줘, 내 말을 들어줘, 다가와 내 눈을 봐줘.
나를 인정해 줘 그러면 너를 인정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정확히 원하는 것을 얘기했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몰라 화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만 낼 줄 알았고 그녀는
침묵으로 화를 냈다. 그녀의 말수는 급격히 줄었다. 그녀와 같이 있을수록 고독했고 고독은
불안을 만들었다. 그녀의 변화는 언제부터였을까? 나만 모르던 나의 냄새를 언제부터 맡았을까?
내가 기억할 수 없는 틈으로 균열은 커져만 갔다. 그녀는 나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
그림자가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신부의 큰 목소리로 아침부터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엄마! 화장대 위 목걸이 좀 가져와!"
"아빠! 꽃은 이따가 달아, 꽃 망가져!"
"수지야! 들러리 옷 구겨지지 않았나 확인해 봐!"
신부의 에너지가 대단했다. 밝은 성격이라는 표현만으로 모자람이 많은 여자였다. 바로 옆
사람에게도 고함을 지르듯 했다. 거기다가 과장되어 보이는 몸짓. 이런 여자와 살면 피곤하겠다
라는 생각을 할 때, 신부와 너무도 똑 닮은 신랑과 인사를 나눴다. 오늘 하루 잘 부탁한다며 바로
형님이라 불렀다. 크게 웃는 그 남자의 은색 어금니가 훤히 보였다. 사람 끌어 모으기 힘든
단체사진 촬영 때에는 사진사 형님 힘들게 하지 말라며 하객들에게 고함을 쳤다. 그 옆 신부는
주먹을 내 보이며 사진사 오빠 파이팅이라고 외친다. 무안함은 내 몫이었고 어설프게 지었을
내 표정에 귓가가 닳아 올랐다. 너무도 닮은 두 사람은 얼마나 서로를 알고 있을까?
두 사람은 클럽에서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만났다고 한다.
적막한 집안 공기를 깨트리는 물건들이 있다. 고개 숙인 칫솔. 녹 자국 남긴 면도 크림.
서로를 외면한 듯 누워 있는 수저들. 세월을 새긴 낡은 운동화….. 같은 것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 그림자가 떠나버린 듯 한 허전함에 깜짝 놀란다. 그럴 때면 나는 멍하니 어머니 눈을
닮은 내 눈을 바라본다. 거울 속 나는 아직도 말없이 인내심을 발휘한다.
‘그만하자! 우리.’ 레스토랑의 고요함에 침묵을 더하고 있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다. 맨해튼의 '뷰'
레스토랑이었다. 전망대의 바닥이 서서히 움직여 삼백 육십도 회전을 하는 곳이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왔다가는 다시 회전을 하는 곳. 나는 와인을 맛보듯 마신다. 그녀의 입은 미소를 지었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눈가의 처진 주름이 깊어 보인다.
마시던 와인에 대해 생각한다. 어디 와인이지? 몇 년도 산이지? 당도는?.....
당신도 힘들었구나 속으로 외쳐본다. 그녀의 시선이 시작되는 곳에 내 시선을 얹는다.
피해자 역할을 어떻게 실감 나게 연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툰 연기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화목하지 못한 가족은 어떤 규칙이 있다.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판다. 몰랐다고 말하며
퍼붓는 너무도 무책임한 말들. 가족이기에 잘 알고 있는 서로의 상처들. 다가오는 가족에게
‘넌 가서 밥이나 먹고 있어’ 라며 외치는 떳떳함에 흠칫 놀라는 나. 처음 보는 가족에게서 느끼는
익숙함. 그 기시감이 나를 옥죈다.
아버지에게 이혼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넌 자식 없어 다행이라고 한 마디를 하셨다. 그러고는
고개 돌려 시선을 멀리하셨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볼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가까운 것도 멀리 보려는 시선이었다.
몇 시간째 인지 모르겠다. 컴퓨터 앞에 앉아 사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눈이 건조해져
깔끄러움이 느껴질 때쯤 창 밖을 내다봤다.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을까? 눈이 쌓여있다. 눈발도
굵다. 가슴 가까이 있던 자판기를 밀어내며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켠다. 서서히 일어나 입고 있던
운동복에 바지를 하나 더 끼어 입고, 스웨터에 재킷을 걸치며 나갈 채비를 한다. 신발장에
있어야 할 부츠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건 색 바래고 구겨진 운동화. 운동화의 뒤축을 펴
신는다. 장갑을 어디에 뒀더라? 장갑은 우산꽂이와 신발장 사이에 접혀있다. 꽃이 수놓아진
그녀의 장갑이었다. 억지로 마디 굵은 손을 구겨 넣는다. 포근해 보였던 날씨는
눈이 만들어 낸 신기루였는지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날카롭다. 걷다 서서 재킷의 지퍼를 목젖까지 올린다.
모자를 안 챙긴 걸 후회하며 걷는다. 기왕 나왔으니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공원까지는 가 볼 작정이다.
눈 내린 텅 빈 공원이 보고 싶었다. 탐스러웠던 눈은 이미 발목에 스며들었고 근육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계속 가야 하나? 되돌아가야 하나? 를 생각하며 걷지만 이미 되돌아가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안다.
저만치 공원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고 바람은 더욱 야무지다. 바람에 날리는 눈은 시야를 가린다.
이제는 생각 없이 걷는다. 공원을 꼭 보고 가겠다고 되뇐다.
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아무도 없는 적막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상상했던 전경이었다. 편치 않은
고개를 돌려 눈 쌓인 미끄럼틀을 보며 이제는 놀이터에서 자취를 감춘 시소를 상상한다. 양쪽
균형이 맞아야만 즐길 수 있는 기구. 그때 미끄럼틀 옆의 땅이 움직인다. 헛것을 보고 있나?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그쪽으로 걷고 있다. 멈추지 못한다. 발목을 파고든 눈은 피부를
아린다. 천천히 움직이는 땅을 주시하며 거리를 좁혀 나간다. 기이한 모습이었다.
눈을 뒤집어쓴 기러기 떼. 눈을 뒤집어써 희고 둥근 몸통에 징그럽게 큰 물갈퀴. 기러기 떼가 왜 이곳에 있을까? 기러기는 철새 아니었나? 낙오한 걸까? 이곳이 철새의 목적지인가? 나의 호기심은 아랑곳없이, 규칙적으로 몸을 뒤뚱거리며 기러기 떼는 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기러기들이 내 앞을 지나칠 때까지 기다린다.
마지막 몇 마리가 내 앞을 지날 즈음, 한 놈이 크기는 다른 것들과 별 차이 없는데 눈 틈으로
보이는 깃 털 색깔이 달라 보였다. 짙지 않은 갈색. 보스라기 같은 깃털. 그 옆의 한 마리가
보스라기 옆에 바짝 달라붙어 내 앞을 지나간다. 목 근처의 짧은 깃털을 곧추 세운 모습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기러기의 눈을 외면하며 머리 위 눈을 털어낸다. 나는 기러기 떼를 피해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감각 무뎌진 발을 내려다봤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있다. 꽉 끼던 장갑을 힘겹게 벗으며 나도 모르게 손의 냄새를 맡는다. 기억을 부르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녀의 향이었을까? 알 수 없는 향은 곧 흩어진다. 손에 입김을 불어 보지만 금방 서늘해진다.
고부라지는 손으로 젖은 운동화 끈을 잡아맨다. 어렵게 익숙한 매듭을 고쳐 매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걷고자 하는 건 마음뿐. 흰 눈의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제자리걸음을 한다. 텅 빈 공원을 둘러본다.
보였다 말았다 하는 희미한 그림자가 거추장스럽다. 뒤늦은 후회가 달라붙는다.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
호수에서 건너온 바람이 얼굴을 거세게 때린다.
그녀에게서 보이던 그림자는 나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