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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Oct 25. 2024

부유하는 상처 C1

떠나야 했던 인생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이른 아침의 운전이 부담스럽다. 마주 오는 차의 커다란 불 빛이 시야를 흐트러트리고 집중을 방해했다. 차의 속도를 줄이고 손과 가슴을 좀 더 운전대에 가까이한다. 큰 딸아이 부부가 손자를 맡겨 놓고 여행을 갔다. 몇 년 전부터 계획했던 한국일주 여행을 하고 온단다. 손자를 아침마다 학교에 데려다줘야 했다. 맏딸 역할 톡톡히 한 큰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 말고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은 내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혼자 살며 거르던, 아침 걱정을 한다. 빵을 준비하면 될 일이지만 손자의 눈치를 살폈다. 사춘기인지 잔뜩 예민해진 게 제 어미를 빼다 박은 사내놈이다. 손자를 학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슨 공사 인지도 모를 공사로 며칠 전부터 중장비들이 길을 메우고 있다. 포클레인, 트럭, 불도우저.. 2차선의 도로가 더욱 좁아졌다. 맞은편 차를 지나칠 때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겨울 끝무렵의 아침은 어둠을 미처 거두지 못하고 나는 예전 같지 않은 육신 탓을 한다. 공사구간이 거의 끝나고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뿌염한 전방이 답답해 신경질을 담아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마른세수를 하듯 창 닦이는 별 효과가 없었다. 차창이 문제가 아니고 쓰고 있던 안경이 문제였다. 혼자 무안해하며 고개 돌려 버스 정류장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줄 서있는 사람들의 옷 두께는  제각각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이다 보니 마음의 온도도 제각각이었다. 두툼한 파카를 입은 사람 옆에 얇은 스웨터 차림인 사람이 서 있다. 잔뜩 경직된 모습이 우스워 조절 안 되는 미소로 사람들을 살피다가 청자켓에 검은색 면바지를 입은 여자에 눈이 멎었다. 다리 선에 맞춰 바지를 꿰맨 것처럼 다리 윤곽이 훤히 보였다. 곡선 큰 웨이브 머리에 얼굴은 가렸고 다리만이 꼿꼿한 모습. 그녀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였다. 그렇게 잊으려고 했던 그녀였다.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허둥거리는 손으로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뒷 차가 크게 경적을 올렸다. 경적 소리에 그녀가 내 쪽을 쳐다봤다. 순간 눈이 마주치고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일 리 없지만 그녀와 너무 닮은 여자였다.  


미스 신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세련된 밝은 색의 옷을 즐겨 입는, 청자켓도 당시에 유행하던 짙은 색깔보다는 물 빠진 옅은 색깔로 멋을 냈다. 도화동의 경보 극장과 연결되는 좁고 길지 않은 동네길에서 미스 신은 스타였다. 미스 코리아 같은 굵은 파마머리,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 꽃무늬 플라스틱 대야를 허리에 걸치고 목욕탕이라도 갈 때면 보금당 아저씨도 청산 슈퍼 아저씨도 밖으로 나와 곁눈질을 했다. 그녀가 목욕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더 많은 아저씨를 볼 수 있었다. 눈은 곁눈질이었지만 그녀의 비누냄새라도 맡으려는 듯 코들은 하늘을 향했다. 개 흉내를 내던 아저씨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커다란 눈은 언제나 반달 모양으로 웃고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내 눈에 미스 신은 보호 해 주고 싶은 대상이었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엄마는 아빠에게 문간방 세가 나갔다고 했다. 전라도 이리에서 올라 와 데려 올 친구도 없는 혼자 사는 여자랬다. 살림도 단출해 바로 결정을 했단다.

1주일 후, 동네 끝자락에서 보던 그녀를 우리 집 마당에서 보게 됐다. 우리 식구가 사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마루 정면에 그녀의 문간방이 있다. 동네 길 쪽으로 창문을 낸 아주 조그만 방이었다.

정신 차리자고 다짐하며 운전을 계속했다. 손자를 7시 30분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 그녀를 본 건 7시 45분 정도였다. 하기 싫었던 일이 뒤늦게 고마워진다.

다음 날, 손자를 내려주고는 들뜬 마음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정류장에 없었다. 방금 지나 친 버스에 이미 오른 걸까? 공허하게 빈 버스 정류장만 쳐다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영어와 한국어 단어 사이에서 방황하며 불분명했던 기억이 그림으로 떠 올랐다. 기억의 파편이 점점 뚜렷해졌다.


학교에 다녀오니 미스 신은 이삿짐을 풀고 있었다. 모르는 척 문간방을 지나쳐 가는데, 대뜸 그녀는 나를 꼬마라고 불렀다.

"꼬마, 학교 다녀오니?"

"나 이름 있어요!"

"누가 이름 없대,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지."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거 같아 소리를 질렀다. "엄마! 배고파 밥 줘!"

어느 일요일이었다. 마루에 누워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마루에서 마주 보이던 그녀는 좀 전까지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빨래가 끝났는지 좀 전까지 시끄럽던 물소리가 멎었다. 누워서 붙들고 있던 만화책에서 눈을 떼고 문간방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잽싸게 눈을 만화책으로 옮겼다.

"꼬마야! 꼬마야!"

"아, 왜요?" 귀찮은 척하며 고개를 돌려봤다.

"이리 와 봐." 둘 밖에 없는데 목소리를 낮추며 손짓을 했다.

"왜요?" 만화책을 내려놓고 서서히 일어나 마루밑 널려진 슬리퍼를 발가락으로 당겼다. 짝도 안 맞는 슬리퍼를 끌며 좁은 마당을 거쳐 그녀가 있는 쪽마루 앞으로 갔다.

"꼬마야, 너 커피 마셔봤어?"

"커피요? 커피우유는 먹어봤어요."

"마셔볼래?"

"진짜요?"

"매니큐어 거의 다 말랐다." 그녀는 손가락을 입으로 후후 불며 하얀 손에 새빨간 손톱으로 뒤편의 장난감만 한 노란색 주전자를 집었다. 그러고는 쪽마루에서 폴짝 뛰어내려 마당의 수도에서 물을 받아 곤로에 올렸다. 불을 켜놓고는 찬장에서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 손잡이에 멋을 낸 작은 잔이었다. 쪽마루 앞의 나는 그녀 방을 곁눈질로 살폈다. 비키니 옷장 옆의 앉은뱅이 화장대에는 아모레, 피어리스 병들이 사이좋게 정렬돼 있었다. 작은 병이나 네모 상자에는 뜻 모를 한자들이 적혀있었다. 커피잔을 꺼낸 찬장은 고춧가루, 간장, 된장, 고추장이 안 보였다. 찬장에는 커피와 커피잔, 접시밖에 없었다. 그녀는 커피병을 꺼내 작디작은 스푼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분말커피를 잔에 옮겼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눈은 알록달록한 접시에서, 앙증맞은 사기그릇들에서 서성였다. 그녀는 끓는 물을 붓고 그 작은 스푼으로 빠르게 내 잔에 설탕 세 스푼을 넣고 자신의 잔에는 한 스푼을 넣었다. 그리고 프리마 두 스푼을 넣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 쓰면 말해, 프리마 더 넣어줄게"

그날 밤 아무리 숫자를 세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별들을 세어보고, 본 적 없는 양의 숫자도 세어 보았다.

잡지 못 할 잠은 멀리서 비웃고 머릿속은 전파사 앞에 서 본 텔레비전 마냥 선명했다.

그때 미스 신의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잠깐의 침묵 후에 대문의 빗장 들리는 소리, 그 익숙한 나무 스치는 소리가 귀를 할퀴었다. 연이어 구두 소리가 들렸다. 무게에 짓눌리는 쪽마루의 비명이 들리고 소리는 사라졌다. 더워서 차 버렸던 홑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마루의 자명종 시계가 12번 울렸다. 통행금지 시간이 됐고 곧 귀신이 나올 시간이었다. 몇 발짝 안 되는 마당의 넓이를 원망했다. 미스 신이 귀신을 불러들인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잠이 덜 깬 손자를 재촉했다. 일찌감치 갔지만 정류장은 비어 보이기만 했다. 체념한 채로 서서히 차를 모는데 저 앞 좁은 교차로에서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내 차를 지나쳐 가는 그녀. 미스 신이었다. 순간에 본 지난번 얼굴을 착각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예전의 그녀를 빼닮은 그녀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기어코 차를 길가에 세웠다.


쓸데없이 안방과 건넌방을 오가고 있었다. 무척 더웠고 규칙적으로 터덜거리던 선풍기가 기억난다.

"꼬마야! 커피 마실래?" 그녀의 목소리가 내심 반가웠지만 내색을 못했다.

"꼬마라 부르지 마요!"

"그럼 야마꼬 어때?"

"그게 뭐예요?"

"뭐긴 뭐야! 꼬마야 거꾸로 한 거지.." 그녀는 뒤로 넘어갈 듯 크게 웃었다.

나는 약이 올라 소리를 냅다 질렀다. "싫어요! 더운데 무슨 뜨거운 커피를 마셔요!"

"그래 덥긴 덥다.. 이번 여름 지독하네.." 서서히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번졌다.

"꼬마야 우리 등목하자! 이리 와!" 그녀는 이미 티셔츠를 긴 목 위로 올리고 있었다.

"누구 올지 모르니 넌 문부터 잠가!"

나는 대꾸도 없이 그녀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문의 빗장을 잠그고 수돗가로 갔다. 그녀는 이미 가슴을 내보이며 엎드려 있었다.

"팔 아파.. 빨리 물 좀 뿌려봐!" 수도에 걸려있던 초록색 호스를 끌어당겨 조심히 물을 흘렸다.

"야! 간지러워.. 바가지로 그냥 뿌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기에 바빴다. 엎드려 있으면서도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가슴 쪽으로 물을 보내려는 하얀 손 그리고 더 하얀 젖가슴에 현기증이 났다.

"꼬마야 뭐 해? 저기 수건으로 물기 닦아야지.."

나는 쪽마루 위 빨래 줄의 수건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내 눈은 그 옆 엷은 색 브래지어에 멈춰있었다. 그 색이 베이지 색이었다는 건 한참 후에 알았다.

"야마꼬! 빨리 닦아 팔 떨어지겠다!"

그때서야 그녀를 돌아보고 등의 물기를 닦았다. 점 하나 없는 등이었다.

"자 이제 네 차례.. 뭐 해? 엎드려!"

"저 등목 안 할 건데요!" 나는 집 마루로 도망치듯 뛰어올랐다. 늦여름, 마루는 끈적이기만 했다.


오랜만에 고등어를 사 왔다. 냄새 배는 게 싫어 집에서는 잘 먹지 않는 음식인데 손자가 먹고 싶단다. 

미국에서 자란 애가 별게 다 먹고 싶네라는 생각을 하다가 사돈집에서 먹어봤겠지라고 지레짐작했다. 갑자기 술 좋아하는 사돈네가 생각나,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생선 손질을 시작했다. 어두워진 눈이 세심해진다. 배를 갈라 내장, 아가미를 엄지 손가락으로 밀어내고 칼로 내장을 쓸어냈다. 포를 뜨듯이 반으로 펼쳐 조심스럽게 잔가시를 제거하고 기왕 시작한 거 깔끔하게 끝내자고 다짐한다. 쓸 일 없던 굵은소금을 한참 찾아야 했다. 손질한 고등어에 소금을 뿌리고 채반에 올려놓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던져 놓고 엄마의 잔소리 전에 손을 씻으려던 참이었다. 마당의 수도에 허리를 숙이는데 앞집에 사는 원식이 엄마가 숨을 몰아 쉬며 쏟아지듯이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엄마 계시니?" 말은 나에게 하며 턱으로 문간방을 가리키고, 입모양으로 있어?라고 물었다.

쪽마루 밑에는 신발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 엄마! 원식이 엄마 오셨어!"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마당 옆 부엌에 있던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 숨 안 넘어가! 왜?"

원식 엄마는 촐싹거리는 걸음으로 엄마를 부엌으로 되밀며 들어갔다. 좀 전까지 목청을 높이던 두 여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방에 들어 가 라디오나 들으려는데 벽을 타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스 신 얘기가 언뜻 들린 거 같아 벽에 귀를 갖다 댔다. 

"아 그렇다니까 12시가 다 된 시간에 이 집으로 들어가던 게 저 아래 중국집 짱개라니까.."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알고 계셨어?" 엄마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들리는 건 원식 엄마의 목소리뿐이었다.

"내 그 여자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 알면서도 그냥 놔둘 거야!, 어쨌거나 요즘 젊은것들이 그렇다니까.. 어찌나 남자들을 홀리는지...." 원식 엄마의 혼자 말과  혀 차는 소리가 귀에 털썩 붙었다.

동네 길 쪽의 창문을 두드리는 손, 무게가 느껴지는 발걸음. 아무리 조심해도 소리를 만들어 내는 빗장은 귀신이 아닌, 짱개였다. 중국집을 다섯 개나 갖고 있다는 화교였다.

나의 가을 소풍날 미스 신은 이사를 갔다. 소풍에서 돌아오니 문간방은 비어있었다. 이른 여름 짐을 풀었다가 가을에 짐을 싸 나갔다.

세입자가 들어오기 전에 전셋값을 돌려줘야 한다고 아빠는 당황했다.

"아 그러길래 왜 갑자기 잘 사는 사람 내보내고 그래!"

"동네 사람들이 엔간해야지요!"

"뭐라고들 하는데?"

"젊은 년이 유부남 짱개 하고 놀아난다고 얼마나 수군거린 지.. 알기나 해요! 남자들이 더 했다니까!"

"됐다, 됐어 애들 듣겠다. 목소리 낮춰!"

미스 신을 닮은 여자들과 몇 번 마주했다. 교회의 성가대 선생님이 미스 신을 닮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세운상가 근처의 조명가게에서 미스 신을 봤다. 미스 신의 행방은 몰랐지만 미스 신을 닮은 그녀들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녀들의 브래지어와 하얀 젖가슴을 상상했다. 내가 정상이라고 믿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주위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또 다른 미스 신을 찾아 헤맸다. 미스 신들과 가까워질수록 멀리하고, 그 멀어진 거리를 원망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그들은 내 잘못이라 했다. 나이 서른이 되었지만 연애는 남의 일이었다.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들이 나섰다. 맞선 자리에 나가 만난 이들 모두가 중매쟁이 탓, 내 탓을 했다. 그들은 내가 아프다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아프다고 했다. 정신이 아파서 그렇다고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괴로움만 늘어 갔다.

서른두 살 생일이 지나고 며칠 후였다. 이민을 가 지금은 뉴욕에 사는 이모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모가 개업한 야채가게에 일손이 필요한데 이 참에 뉴욕으로 와보는 게 어떠냐는 물음이었다. 어머니, 아버지와 상의를 했다. 좋은 생각이라며 다녀오라고 했다. 뉴욕행은 이모와 어머니가 미리 계획했던 일이었다. 뉴욕 구경을 하며 마음 정리를 하려던 계획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며 허물어졌다. 한국으로 돌아갈 용기가 서지 않았다. 이모의 주선으로 맞선을 보고 두 달 후에 식을 올렸다. 나보다 더 기뻐한 건 어머니, 아버지, 이모였다. 다행히 야채가게 일에 재미를 붙였다. 새벽부터의 생활은 다른 생각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5년의 주급 생활 끝에 아스토리아에 가게를 갖게 됐다. 작은 가게였지만 딸 둘을 키우며 주 7일 가게문을 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돈 세는 재미로 피곤을 잊었다. 과일이 건 야채 건 진열만 해놓으면 팔려 나갔다. 늦은 밤 돈 세는 것도 귀찮아 돈이 든 누런 봉지를 매번 침대 밑으로 쑤셔 넣었다. 어느 날 돈을 세려고 침대 밑을 보니 돈이 가득한 누런 봉지가 먼지를 묻힌 채로 쉴 새 없이 나왔다. 돈 봉지는 언제 넣었는지도 모르는 옷장, 화장대, 서랍 같은 곳에서도 발견됐다. 간혹 가슴에 묻어 둔 아물지 않은 상처가 꿈틀거렸지만 곧 상처는 내 몸 어딘가의 심해로 가라앉았다. 부력의 힘이 미치지 못할 곳이었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을 했던 사람과는 19년을 같이 살았다. 비가 오던 저녁, 소파에 누워 자다가 깨어나지 못했다. 나에게 늘 얼음처럼 차다고 불평하던 사람이 냉정히 갑자기 떠났다. 너무도 황망한 죽음이었고 나는 죽음을 우두커니 받아들였다.


손자 녀석을 데려다주는 일이 기다려졌다. 늙지 않은 미스 신을 보기 위해 애썼다. 가슴속 심해에서 부유하는 상처가 믿기지 않았고 재발한 아픔에 괴로웠다. 아이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류장이 보이는 교차로 옆에 차를 세운다. 그녀는 왼쪽에서 꺾어져 내 앞으로 걸어올 것이다. 가늘기만 한 다리로 부드럽게 걸어 내 앞을 스쳐간다. 주저함에 뒤 돌아보지 못한다. 방금 지나버린 찰나를 그리워한다. 백미러에 집중해 본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내일을 기약한다. 나는 예전의 꼬마가 된다. 야마꼬가 된다. 두 주후, 딸 부부의 여행이 끝났다. 하지만 나의 아침 외출은 계속됐다.

무심히 집을 나서 도서관 앞으로 갔다. 항상 여기서 꺾어져 버스 정류장으로 갔으니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면 된다.. 7시 35분이 넘었다.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7시 40분..  7시 50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8시까지만 기다려보자는 생각.. 8시가 되어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샛길이 있나? 그냥 버스 정류장 앞에서 기다릴 걸 잘못했나? 실망한 손으로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이려 할 때, 오른쪽 집에서 그녀가 나왔다. 도서관 옆의 두 번째 집이었다. 그녀의 집이었다. 다리가 일자로 모아지는 걸음 거리, 보폭이 좁아 위태로워 보였다. 그때서야 나는 안심한다.


겨울이었다. 미스 신은 이사를 가고 딱 한 번 우리 집에 들렀다. 고향에서 보내온 편지를 가지러 왔다. 갑자기 방을 비워 달라고 해 미안했다며 엄마가 귤껍질로 끓인 차와 시루떡을 내왔다. 엄마는 눈짓으로 나를 방에서 내몰았다. 마지못해 방을 나와서는 마루에 서서 방 쪽으로 귀를 곤두 세웠다. 목소리를 낮춘 엄마의 목소리가 창호지 문틈을 통과했다.

"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게 말이 돼, 기차 폭발 이라니.."

"많이 놀라시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으세요."

"그만하길래, 다행이네.. 죽은 사람도 많은데.. 그건 그렇고, 미스 신도 결혼해야지, 언제까지 그러고 살려고?"

방은 고요했다. 마루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발이 시릴 때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이 못 헤어지겠데요.. 내가 불쌍해서 못 떠나겠데요.."

방안의 어색한 공기가 나에게 까지 전해졌다.

"아저씨 오실 때 됐죠? 저 이제 가볼게요.. 편지 고맙습니다."

"그래 더 어두워지기 전에 가봐!"

"편지는 더 안 올 거예요. 바뀐 주소 아버지께 알렸어요."

찻상이 밀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건넌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미스 신이 다부지게 외쳤다. "야마꼬! 나 간다.!"

나는 내다보지도 못하며 미스 신에게 못 미칠 '안녕히 가세요!'를 외쳤다.

얼마 후였다. 원식이 엄마는 미스 신이 짱개를 따라 미국에 갔다고 했고, 창오 엄마는 그녀가 고향 이리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녀가 어디로 갔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는 생각을 나는 나이가 들어서야 했다.

더 이상 듣지 못할 야마꼬라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만 퇴적이 되어 내 몸 어딘가에서 굳어졌다.


아침 7시면 집을 나섰다. 그녀의 집 맞은편에 차를 세우고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집 문을, 창문을, 우편함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매일이었다.

그렇게 미스 신은 또다시 사라지고, 굳어졌다고 믿었던 퇴적물은 부유해 떠 돌았다.

오랜만에 가족 모임을 갖기로 했다. 손자의 초등학교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시집 안 간 둘째도 참석한다고 하더니 갑자기 못 온다는 연락을 해 왔다.

"넌 하나 있는 이모라는 게 졸업 축하도 못하냐!" 소리를 냅다 지르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둘째 탓만은 아니었다. 서먹하기만 할 사위와의 저녁 자리 때문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심통 난 노인네 마냥 사위를 맞이하겠지. 공감 안 되는 사람과의 소통은 감정 낭비일 뿐이다.

장소는 일식집이었다. 가족 모임이라고 해도 딸 내외와 손자 그리고 나뿐인 자리였다. 나와 딸은 회를 좋아하지 않는데, 회를 좋아하는 사위가 손자를 꼬드겨 정한 장소였다. 회에는 손도 안 대고 딸려 나온 밑반찬 정도에만 젓가락을 놀렸다. 내 눈치를 보는 딸아이를 애써 외면했다. 어려서부터 내 눈치를 보던 맏딸이라 미안하다가도 술 좋아하는 사위를 보고 있자면 주체 못 하는 심술이 나온다. 저녁을 먹는 내내 딸 부부는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다르다는 뻔한 말과 벌써 대학 걱정을 해댔다. 간혹 전화기에서 눈을 뗀 손자가 고갯짓으로 호응을 해줬다. 눈치 빠른 사위가 분위기는 아랑곳 않고 벌써 소주가 2병째다. 언제나 사위는 술기운으로 무거운 공기를 모면하려 한다. 압박하던 숨을 내쉬며 식당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웃음소리마저 리듬감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그중, 단발머리 여자의 낮은 광대뼈 얼굴이 보일락 말락 했다. 거부 못 할 기시감에 길게 느껴진 순간을 기다려 그 녀의 눈과 코를 확인했다. 미스 신이었다. 머리 모양이 바뀐 미스 신 언니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 제시카다.. 제시카!" 천둥 같은 사위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침묵은 깨지고 딸도 단발머리 여자 쪽을 쳐다봤다. 반달눈의 언니가 뒤돌아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일행 쪽을 향했다.

나도 모르게 다급한 소리가 터졌다.

"최 서방 저 여자 알아?"

"네, 장모님, 예전에 제 가게에서 일했어요. 자기도 기억나지? 제시카." 사위는 딸에게 확인하 듯 물었다.

"아.. 그때 그 제시카! 아마 아버지가 중국 사람이었지?" 딸도 기억이 난다는 시늉을 했다

"그래 맞다니까.. 이게 얼마만이야?" 사위는 과도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딸은 인사를 하겠다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미스 신 언니는 더 젊어진 듯 보였다. 언니를 잊으려 했던 시간들이 한스럽기만 했다. 내쉬기만 하던 한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위에게 술을 따르라고 팔을 뻗어 잔을 내밀었다.

"술?.. 술이요? 장모님.. 술 드시게요?" 사위가 작은 눈으로 놀란 표정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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