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인가, 탈출인가
나에겐 유일한 낙이 있었다. 지금 내 옆에서 아이들 장난감 좀 빨리 치우라고 잔소리하고 있는 집안 서열 No.1께서 나의 여친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아직 회사 잘 다니던 시절, 주말이면 그녀와 서로 만나서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는 것이 참 좋았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는 파주, 춘천, 새만금 같이 먼 동네까지(사는 곳이 경상남도라...) 가서 맛집이란 맛집은 다 찾아다녔고 여유가 없으면 없는 대로 집 근처 동네 맛집을 찾아다녔다. 맛있는 걸 사 먹는데 돈을 아끼진 않았다. 내 돈 주고 사 먹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으면 그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고 반면에 맛이 별로면 그 날 기분은 꽝이었다.
그런 만큼 직접 만들어 먹는 것도 좋아했다. 보통은 집 냉장고를 뒤져서 나오는 것 반찬들을 한데 섞어서 비빔밥을 자주 해 먹곤 했었지만 여유가 있을 땐 집 근처 축산물 시장에 가서 괜찮은 가격에 파는 고기가 있으면 바로 사서 구워 먹고 남은 건 양념에 재워놓고 두고두고 먹기도 했다. 집에 빵가루가 있으면 돈가스 같은 것도 직접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런저런 음식들을 만들어 먹다 보니 자연스레 식당을 차려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식당 차리고 싶다는 그 생각이 공교롭게도 퇴사를 하려고 마음먹은 다음에 계속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 당시 감정이 퇴사를 하고 싶은 충동적인 마음에서 식당 창업까지 생각한 건지, 마침 우연히 생각이 이어진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건 충동적인 마음이 어느 정도 작용하긴 했었다.
사실 탈출하고 싶었다.
회사는 제품 특성상 생산 스케줄이 빡빡한 긴급 프로젝트를 많이 수주하다 보니 항상 납기를 맞춰야 된다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정말 바쁠 땐 주말에 쉬는 거래업체 사장한테까지 찾아가서 해당 부품을 만들어 주셔야 한다며 생떼를 쓰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면서 옆에서 다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완성되자마자 트럭에 싣고 회사로 와서 조립을 직접 하기도 했다. 말이 생산관리였지 사무실에서는 서류 작업과 생산 스케줄링, 현장에서는 일손이 부족한 파트에서 보조도 하고 간단한 부품 같은 것은 직접 선반이나 밀링 작업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기만 잘 견디면 다음부터는 개선되겠지 했는데 매번 이런 패턴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일정대로 안되고 조립에 필요한 부품 수급도 어려울 땐 심한 모멸감이 들 정도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말을 상부로부터 듣기도 했다.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 맘 속 한 켠에는 식당 창업의 꿈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읽는 책들이 죄다 식당 창업, 운영에 관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당장 그만둔다면 프랜차이즈로는 어떤 것이 가능하며 단독으로 창업하기에는 어떤 아이템이 좋은지 생각하고 정리해 나갔다. 사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창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지갑 사정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았다. 프랜차이즈는 그래서 일찌감치 후보에서 지웠다.
식당을 창업하더라도 유행하는 프랜차이즈들과 차별성을 두고 싶었고 롱런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경쟁업체의 진입장벽이 높은 아이템으로 창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초밥집이었다.
"여보, 나 식당 차릴래."
어느 정도 생각이 구체화되고 계획이 머릿속에서 잡혀 갈 때 나는 와이프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인생의 방향을 틀어야 하는 순간이므로 가족을 두고 혼자서 독단적으로 행동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어느 정도로 고생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와이프였기에 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경청했었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충분히 보였기에 와이프도 고민은 했겠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 가족 굶기지 마!"
이 말로 와이프는 나의 식당 창업에 동의를 하였다. 그런데 나도 참 대책이 없는 게, 회사를 그만두고 식당을 차리려면 기술이 필요했기에 일식당에 취직해서 식당일을 2~3년 정도 배울 생각을 하긴 했는데 나는 당연히 식당 같은 데는 쉽게 취직이 될 줄 알고 마음 놓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누가 서른 중반의 경력도 없는 사람을 말단 식당 보조로 뽑겠는가. 늦은 나이에 밑바닥부터 하게 되는 식당 취직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일단 퇴사 후 식당 일자리 구하는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느 정도 창업 계획은 실력과 경력을 필요로 하는 초밥집 창업이었기에 식당일을 하면서 중장기적으로 수년 뒤에 내 가게를 차릴 것을 생각했다. 정말 최소 2~3년은 누구 밑에서 일해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런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는 몇 번이나 실패했던(과거에도 몇 번 퇴사를 시도했었으나 사장님의 만류로 포기했었음) 사직서에 사장님 서명을 받기 위해 사장실 문을 열었다.
"사장님! 사표 수리해 주십시오."
사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었다. 사장님이 어떤 식으로 만류하실지 예상하면서 답변할 내용까지 시뮬레이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장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느끼셨는지 인생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고 난 뒤 사직서에 사인을 받고 사장실을 나왔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동료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서운해하는 팀원들에게는 애써 밝게 웃으며 회사 떠나는 날까지 웃으며 지내자고 했다. 내 자리를 뒤이어 맡아서 책임질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몇 주간에 걸쳐서 하고 친분 있는 동료끼리 소주잔도 기울이는 동안 어느새 회사를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그전까지는 몰랐는데 막상 마지막 날 회사 문 밖을 나설 때의 공기는 너무도 차가웠다. 마치 나의 앞날을 예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