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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없어도 행복하기.

부러움에 묻어오는 시기와 질투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남을 부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의식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성공에 시기와 질투가 느껴진다.

그러면 맑은 물에 검은색 잉크가 떨어지듯이

나의 마음에 떨어진 부러움은 점점 열등감과 자기혐오로 퍼진다.

그래서 타인의 행복을 들을 때마다 자기혐오를 달래기 위해서 자존감이 높은 척 부단히 노력했다.


나에게 타인의 행복이 시기와 질투로 시작해서 자기혐오까지 느껴지는 것은 타인이 미워서가 아니다.

미움을 갖지 않았던 타인의 행복에도 열등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부러움이 열등감과 자기혐오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오랜 시간 누적된 경험이 만든 것이라서 마치 선천적인 것이라고 느껴질 만큼 빠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누적된 경험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갖지 못했던 물건들에 대한 갈망이 늘었던 경험과

시험에서 떨어지고 재도전을 해야만 했던 목표들이나 고백의 거절 혹은 제안의 거절 등

욕심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패배감인 것 같다.

심지어 장기하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노래 할 때마다 부러워하는 내가 미성숙한 것 같아서 열등감은 더욱 커졌었다.


그런데, 이런 부러움에서 시작되는 열등감을 고민하다 보니, 모든 사람의 행복이 나에게 열등감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경우에는 일론 머스크의 성공이나 유명 배우나 가수의 성공 스토리, 혹은 매주 나오는 로또 당첨자의 이야기는 부럽긴 해도 시기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 들이 그런 성공을 얻을 만큼의 노력이나 과정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이들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심지어 꼭 실제로 만날 수 없는 대상들만 다른 사람이라고 느낀 것은 아니었다. 가깝게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즐거움이나 행운이 부러워도 내가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자기혐오를 느낀 적이 없었고, 가까운 친구가 건물을 사고 제주도에 집을 지었을 때도 부럽긴 해도 나에게 열등감으로 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느낀 부러움이 열등감으로 이어지는 대상은 나와 비슷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의 성공이나 나와 비슷한 여건 혹은 내가 무시하던 사람의 성공이었다. 행운과 행복이란 보상이 뺏긴 것 같은 시기와 질투였고, 그 감정들을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규칙을 지키려는 위선이 나를 탓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보면, 내가 타인의 성공에 열등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상대를 어떤 식으로든 '경쟁 상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자기혐오와 열등감에 대한 우울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는 말을 단어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사랑하는 느낌을 갖으려고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나를 속이는 것 같았고 열등감이 느껴질 때면, 불쾌한 냄새가 나는데 애써 안 난다고 외면하는 것처럼 이상한 노력을 했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보다 주변의 사람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으니 오히려 열등감이 많이 사라졌다.

학벌, 부모, 능력이나 경제적인 비교, 외모의 비교 등
그 어떤 비교도 없이
나를 바라보면서 열등감이 사라졌다.


내가 나를 바라보려고 하면서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립하려는 욕구가 생겼다. 나를 정립하는 것 중에 타인과 비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나만이 알고 있는 내가 살아온 시간과 경험이었다.


오늘의 나의 환경이 나의 지난 시간과 경험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이 결과물이 나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내 모습에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시간과 경험이 너무 많다. 그것이 모든 것이 자랑스럽거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비교 대상이 없으니 나의 경험과 시간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아는 내가 나에게 행복이었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오던 부러움에서 이어지는 열등감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자인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경험되어야 내면화될 것 같지만, '경험이 곧 유일한 나'임을 깨달으면서 부러움이 열등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의식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러움과 열등감은 분리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인
자존감이 넘치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내 욕심에 비해서 키도 작고, 외모도 마음에 들지 않으며 이루지 못한 꿈도 많이 남았고 욕심에 비해 훨씬 궁핍하다. 하지만, 그것이 열등감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냥 이런 내가 나로서 경험하는 시간들을 겪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다고 내일이 막 기다려지는 설렘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부러움에서 열등감이 빠지고 나서야
경쟁이 아닌 나의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행복이 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던가 누군가의 성공을 부러울 것이 없다는 것은 돈에 관한 계획을 하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이 제어하기 힘든 감정들이다. 그리고, SNS가 우울증을 만들어 낸다는 연구결과 나온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어쩌면 누군가의 성공은 부러운 것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 부러움이 나에게 우울증으로 오는 것을 경계하려고 부러운 것을 부럽지 않다는 식으로 나를 속이는 것보다 그들의 행복이 나와의 경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나의 경험처럼 부러움과 시기가 분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재무계획에서 '돈으로 행복의 계획을 만들 때, 나의 행복에 집중하라.'는 말은 이런 맥락 위에 있다.

타인의 성공을 굳이 외면하거나 나의 욕심을 낮추면서 원래 거기가 자기 행복의 목표였다고 자위하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위한 목표는 타인에게 느꼈던 부러움에 있어도 된다. 굳이 비유룰 하자면, 100M 금매달을 목표로 훈련했지만 동매달은 획득하거나 혹은 목표한 올림픽에 나가지조차 못 했더라도 연습하는 동안에 늘어난 체력과 훈련의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회상이 아니라 과정에서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을 계획한다는 것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패배감이나 자기혐오로 이어지지 않고, 계획에 따라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의 경험이 자기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볼 수 있는 성숙함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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