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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곰씨 오만가치 Dec 27. 2023

기이한 조직도

HR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새해를 일주일도 채 남기지 않은 날. 드디어 조직 변경이 공지되었다. 소문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니 이렇게 생긴 조직도도 있을 수 있구나 싶다. 조직 설계의 기본도 없는 그냥 임원 간 힘 겨루기의 결과물 같다. 보통 CEO 아래 CTO, CFO, CMO가 있다. 보통은 그렇다. 그리고 십수 년 전 나의 회사도 그런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마케팅 아래 신사업 TFT가 들어가 있고 다른 TFT는 또 연구소 아래 가 있다(될 법한 것만 가져가는 건가). 


  어떤 조직은 실장이 팀장을 전부 겸하고 있다. 혼자서 30명이 넘는 인원을 관리한다고? 대단하다. 그렇다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려고 만든 것 같지도 않다. 기대가 없던 조직 개편이지만 눈으로 보니 더 생경하다. 팀장 없는 팀은 구심력이 없다. 몇 푼 하지 않는 팀장 수당이 아까워서일까? 퇴사자가 많아서 팀장도 현업 일하라는 건가(이미 하고 있는 걸 모르는 듯). 조직이 바뀐다는 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함인데 바람만 빠지는 기분이다. (아! 맞다. 팀장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럴 수도.. 그 생각을 왜 못했지!)


  게다가 퇴사가 결정된 사람들 이름이 그대로 조직도에 있다. 사람 많다고 면박 주려고 남겨 놓았나 싶다. 기분 나쁘게 빨간색으로 이름을 표시할 건 뭔가. 하나가 불만이니 줄줄이 불만이 따라붙는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눠도 좋은 얘기가 나오질 않는다. 기대하지 않았는대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예상한 대로 팀장의 자리에 내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팀원 중에 아는 사람이 두 명 정도다. 한 분은 부장님이지만 전문위원 느낌이라서 내가 관리할 분은 아니다. 또 한 명은 같이 일을 했었지만 나보다 연차가 많다. 그리고 이하 팀원들은 그냥 대면대면하거나 모르는 사이다. 조직도 발표도 났는데 뭐라도 해야 할까?


  회사는 사무실이 여러 곳에 있다. 그리고 팀원도 여러 곳에 있다. 몇 명 되지 않지만 다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같이 모여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메타버스에서 일하는 세상이라는데 공간이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낯을 가리는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온라인으로 만나는 게 그렇게 달갑지는 않다. 친해질 일도 없겠다. 아니 친해지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정이 없음 냉정해질 수 있을까)?


  처음 팀장이 되었을 때는 걱정도 많았지만 의욕도 있었다. 팀장은 처음이지만 잘하는 일이었기에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팀원들에게 잘해보자 메일도 썼었다. 그런데 이번은 팀장이 되었다는 기분도 들지 않는다. 팀장인 나조차 무슨 일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 일들이 안갯속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듯 한 기분이다. 회사가 뭘 하려고 하는지 조직이 뭘 하려고 하는지 여전히 확신이 서질 않는다. 무엇보다 열심히 해도 버려질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든다. 그래서 힘이 나질 않는다. 두근대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이것은 마치 아침에 일어나 '내가 왜 결혼했지?'라고 푸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런 결혼 생활이 행복할리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일을 하고 있다. 백지 위에 여러 도구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릴 것이 정해지면 바로 그릴 수 있도록. 아니면 조직은 이미 할 것을 정했는지도 모른다.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아서 내가 못 알아듣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너무 두루뭉술하게 얘기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그냥 책을 살피고 있다.  


  조직도라도 보면 뭔가 으쌰으쌰 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는데..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 그게 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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