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다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다.
끔찍하다고 생각하면 성취감도 의미가 없어서
최고가 되려면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즐거워야 합니다.
- 데이비드 윌슨
요즘엔 쇼펜하우어가 유행인 것 같다. 그동안 '괜찮아. 다 괜찮아'라의 당근이 트렌드였다면 최근엔 다시 서장훈 씨 식 쓴소리가 유행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늘 서장훈 씨의 멘트를 좋아했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서 잘 되길 바라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니까. 아인슈타인도 어제랑 똑같이 살면서 삶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했을 정도니까.
우리가 오해하는 문장들이 몇 가지가 있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엉덩이의 힘이 중요하다"라는 문장은 앉아 있다 보면 뭐든 될 거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너무 즐거워서(혹은 몰입해서) 엉덩이를 떼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즐겁지 않아도 앉아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마저도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인내를 가지고 해 보는 것이다. 최근에는 마지막 문장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즐기면서 하라"라는 말 또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이건 사실 가볍게 하라는 게 아닐 거다. 그래서 서장훈 씨도 이 말을 무척 싫어하는 듯하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얘기가 그냥저냥 하라는 얘기가 아닌데 말이다. 어떤 일을 좋아하게 되면 그 일이 어려워도 부딪히고 도전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기쁨이 된다. 그 과정이 쓰리고 아파도 그것을 해냈을 때 자신이 얼마나 기뻐할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성취감 중독이다. 즐기는 것을 꽤나 잘못 이해하는 것 같다.
고통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정신세계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쾌감은 굉장한 감정적 변화를 주기 때문에 무척이나 행복하다. 행복은 결국 변화량이니까. 산 정상에 오를 거라는 생각으로 등산을 시작하고 당선될 거라는 생각으로 후보로 출마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이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
나는 오늘 조금 더 나아졌어
데이비드 윌슨의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김연아 선수의 안무가 역할을 했던 그가 보아온 최고는 늘 그랬을 거다. 그래서 김연아 선수는 존경받을 만하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즐길 수 있는 마인드가 있어 편파 판정의 아픔과 국민적 성원이라는 부담 속에서도 꾸준했을 거다.
마침 오늘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소설가는 자신의 내적 충동에 따라 자발적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마감이 다가와도 '소설을 쓰고 싶어'라는 내적 충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설을 쓸 수 없다. 소설은 일단 쓰기 시작하면 철저히 혼자가 된다. 프로 야구의 투수처럼 구원 투수를 기대할 수 없다. 소설가는 연장전에 들어가도 15회가 되어도 18회가 되어도 자신이 마무리해야 한다. 시합이 끝날 때까지 홀로 해낼 수밖에 없다.
힘든 상황에서도 하고 싶다고 느끼는 내적 동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러려면 지금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편하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