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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곰씨 오만가치 Jul 15. 2024

사소함이 만드는 기회

너 일본어 좀 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여유가 생겨 이면지에 히라가나를 끄적이고 있었다. 뭔가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습관처럼 적었다. 일본어를 틈틈이 배우려고 했는데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아서였던 거 같다. 지금처럼 배우기 좋은 환경도 아니었다.


 "일본어 잘해?" 지나가던 과장이 히라가나를 끄적이는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아.. 그건 아닌데, 공부해 보려고요"

 "그래? 그럼 매일 아침에 한 문장씩 팀 메일로 보내봐"

 "아.. 알겠습니다"


  원래도 공부할 생각은 있었지만 꾸준히 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매일 아침이 귀찮아지겠구나 싶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개인 메일을 열어 다락원에서 도착한 모닝 레터를 어떻게든 짜깁기해서 발송을 했다. 너무 어렵거나 잘 쓰지 않을 것 같은 문장은 안 될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마우스를 굴리며 괜찮은 문장을 찾았다.


 "어디 보자. 쓸만한 게 있나"


  사실 당시엔 나 역시 일본어가 걸음마 수준이어서 문장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한자를 읽는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나마 재밌어 보이는 문장을 뽑아 보냈다. 매일 아침 고생하며 보냈는데 그렇다고 잘 보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괜히 혼자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계속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업무에 쫓겨 아침에 메일 보내는 걸 잊어버렸다. 그 사실을 알아채곤 '다들 관심도 없는 거 같은데 괜찮겠지'라며 속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 어느 날 화장실에서 과장과 마주쳤다.


 "일본어 안 보내더라"

 "아, 그게 일이 바빠서 못 보냈습니다"

 "그래 얼마나 했지?"

 "한 달 정도 했습니다"

 "그럼 네가 꾸준히 할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인 거네.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네에"


  그 뒤로 몇 번을 더 보내긴 했지만 그렇게 모닝레터 미션은 끝났다. 정말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신입 사원의 끈기와 태도를 보고 싶었는지도. 조금 힘들게 보냈던 메일들은 팀원 전체에게 신입 사원을 알리는 미션이기도 했다. 그 일로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꾸준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이거 뭐라고 읽어?"


  바로 위 선배가 일본어로 된 매뉴얼을 내민다. 매뉴얼을 읽을 정도면 내가 여기 있지 않겠지만 나는 모닝레터로 이미 일본어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겨우 아는 단어 몇 개 읽어가며 알 수 없는 한문들은 사전을 뒤적거렸다.


 "잘하네. 나머지도 부탁해"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났고 나는 홀로 끙끙대 봤지만 해석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선배는 해석을 받으러 올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이미 해결된 것 같았다. 


 "이번에 요코하마 전시회. 누가 갈래? 네가 갈래?"

  팀장은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과장에게 말을 건다.

 "팀장님. 1박 2일이에요?"

 "그래"

 "그거 힘들어서 어떻게 가요. 가면 관광도 하고 해야지"

 "가기 싫음 말고.. 그래서 안 간다고?"

  과장은 나를 쳐다보니 "너 일본어 잘하니까. 네가 갔다 와라" 한다.

 "아~~ 나는 힘들어서 못 가요. 얘 보내줘요. 외국물도 먹고 해 봐야죠"

 나는 부푼 기대에 "정말요?"라고 대답했다.

 "여권이나 빨리 만들어. 특례 중인데 해외 갈 수 있는 거야?"

 옆에 특례 중인 대리가 대신 말해 준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서 출국할 때, 공항 병무청에 신고만 하면 돼요"


  우연히 시작한 모닝레터 사건은 나를 요코하마 전시회로 이어 주었다. 스마트 폰이 없던 시절이라 하네다 공항에 호텔로 가는 방법을 찾아 프린터 했다. "나는 따라갈 거니까"라며 다들 농담하며 지나갔다. 영업 차장은 자신이 바다가 보이는 호텔을 예약해 뒀다고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요코하마 스타 호텔. 하네다 공항에서 내려 요코하마행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에서 제대로 내리면 도보로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에서 진시회장은 전철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하네다 공항을 통해 국내로 복귀해야 한다.


 "우와.. 엄청 빡빡한 일정이네. 과장님이 안 가시려는 이유가 있구나"


  그래도 좋았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는 연차가 높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편했다. 평소 함께 사진 찍던 형들도 함께 갔다. "우리 신주쿠도 가는 거야!!"라며 신나 하면서 말이다.


  일본으로 떠나는 당일. 공항 동쪽 끝에 위치한 병무청에 들러 출국 기록을 남겼다. 하네다 공항이 눈 아래 펼쳐지기 전까지 비행기 안에서 설레는 마음을 즐겼다. 비행 중 전자기기 켜면 안 된다 하여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섬이 하나둘씩 보였고 비행기는 착륙했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줄을 만났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 겨우 통과했다. 그리고 바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경찰로 보이는 남성은 한국어와 영어로 된 보드판을 들고 있었다. '일본어 할 줄 아냐'라는 질문에 당당히 '조금요'라고 대답했다. 일본말을 할 줄 안다는 말에 경찰은 표정이 좋아졌다.


 "일본에 온 목적이 뭔가요?"

 "여행?" 사실 전시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억나질 않았다.

 "얼마나 머물 계획인가요?"

 "일박이요"


  별거 아닌 문장이었지만 현지인과 대화를 나눴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외국어를 배우는 쾌감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요코하마로 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난 전시회라는 단어를 계속 되뇌며 다음에는 꼭 써먹어야지 다짐했다. 사실 언제 또 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두 번째 방문땐 인터뷰도 없었다).


  버스를 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서는 미리 준비해 온 문장으로 쉽게 입실할 수 있었다. 아담한 호텔이었지만 깔끔했고 차장이 말했던 것처럼 바다가 보였다.


 "나가자"


  일행 중 하나가 부축이자 다들 밖으로 나왔다. 미리 찾아둔 요코하마 랜드마크 타워에 올랐다. 스카이라운지까지 만원이라는 통행료가 아까웠지만 눈앞에서 본 후지산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기념으로 키링도 하나 쌌다.


 "이번엔 신주쿠야"

 "가자~"


  다들 신이 났다. 즐거운 발걸음으로 전철로 향했다. 막차 시간도 알아뒀다.

  그러는 와중에 일행 중 한 명에게 전화가 왔다.


 "사장님이 옆동네로 오래. 대표님이 만나제"


 "아! 왜에~~~" 라며 다 같이 소리 지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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